꽃 피기를 기다리며

                                                                                                  고봉진

 작년 5월에 서울에서 분당으로 이사를 하였다. 30년 가까이 강남, 강북으로 옮겨다니며 아파트에만 살다가 비록 4가구가 한 동(棟)으로 이루어진 집단 주택이기는 하지만 땅 냄새를 맡을 수 있는 지상 1층 집으로 옮긴 것이다. 산기슭을 가파르게 잘라 조성한 대지 위에 자리를 잡은 집 주위에는 많은 수목으로 덮인 산자락이 바짝 다가와 둘러 서 있어 마치 깊은 산 속으로 들어와 살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집을 시공한 업자가 앞뒤 뜰에 심어놓은 정원수들이 얼떨결에 길을 잘못 들어서서 시골로 내려오게 된 도시 뜨내기들처럼 눈에 오히려 거슬리고 어색하게 보일 지경이다.

작년에는 이 새 집에서 늦봄부터 시작해서 여름이 지나가고 가을이 왔다가 겨울이 되기까지 철 따라 끊임없이 변해 가는 주변의 자연을 유심히 살필 수가 있었다. 무성하게 녹음을 이루고 있다가 갖가지 고운 색깔로 물이 들어 이윽고 조락하는 나무 잎새들, 여기저기 피고 지는 이름 모를 풀꽃들,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이 날마다 새삼스럽게 신기하고 공기도 언제나 싱그러웠다. 차가 다니는 길에서 제법 떨어진 곳이라 무척 고요하리라고만 짐작했는데, 새벽부터 밤중까지 웬 산새들이 그렇게 우는지, 그리고 벌레 소리는 어찌 그리 요란한지, 밤낮으로 그치지 않는 그 도도한 소리의 흐름은 이 세상에 그런 음악도 있다는 것을 오랫동안 잊고 살아온 사람의 귀에는 자못 황홀하기만 했다. 가을 밤 뒤뜰에서 무심코 올려다본 하늘 한가운데로 낯익은 은하수가 밝게 흐르고 있는 것을 발견하였을 때는 얼마나 감격했는지, 예상도 못했던 뜻밖의 횡재를 한 것 같은 흥분에 휩싸였었다.

평소에 화조풍월(花鳥風月)을 들먹이는 사람들을 만나면, 이 바삐 돌아가는 세상에 한가하고 유장한 취미를 아직까지 용하게 간직하고 있다고 감복하기보다는, 그런 시대 착오적인 정서를 지닌 것을 무슨 선비의 징표나 되는 듯이 코에 걸고 다니는 허풍선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곤 했다.

등산을 즐기는 편이라 자주 산행을 하는 편이지만, 땀으로 범벅이 되어 정상에 오르고 내려오는데 바빠서 도중에 차근히 나무나 풀을 들어다 본다든가, 산새 소리나 풀벌레 울음에 유심히 귀를 기울여 본 기억은 거의 없다. 그러니 등산을 가서 무슨 새, 무슨 꽃이 어떠했다느니, 심지어 계곡의 물 속에서 노니는 물고기나 돌 밑의 가재도 보고 즐겼다는 사람의 글을 접하면, 망원경이나 소용에 닿을 곳에 돋보기를 들고 가서 살피고 왔다는 이야기처럼 우스꽝스럽게 여겨져, 정말 그랬을까 하고 별로 신용이 가지를 않았다. 그런데 이 집으로 이사를 온 후로는 생각이 달라졌다. 그들의 글을 다시 읽어 보고 싶고 다시 보면 공감이 가는 부분도 꽤 눈에 뜨인다.

오디오로 음악을 듣는 시간보다 산새 울음에 귀를 기울이는 시간이 잦아졌다. 책을 읽는 시간을 할애하여 나무와 풀들을 살피고 어루만지는 것이 즐거워 집 주위를 어슬렁거린다. 그런 시간을 통해 느끼게 되는 잔잔한 기쁨을 누구에게라도 전하고 싶어 시도 쓰고 편지도 띄우고 싶다.

가을이 깊어지자 거실 유리창 바깥에 서 있는 감나무에는 잎이 다 떨어지고 한동안 빨간 감들만 매달려 있었다. 그러나 그것들을 여러 가지 산새들이 분주히 날아들면서 거의 다 쪼아 먹었을 때 첫눈이 내리고 긴 겨울이 왔다. 집 주변은 소나무 같은 침엽수를 제외한 대부분의 나무들이 헐벗은 앙상한 가지를 싸늘한 허공을 향해 뻗치고 있는 황량한 풍경으로 변했다. 이중으로 된 창문을 꼭꼭 닫고 지내서 그런지 나무들을 스쳐가는 바람 소리도 새가 우는 소리도 전혀 들리지 않아 겨우내 적막하기만 했다. 그래서 긴 겨울 동안 그 어느 해보다도 봄이 안타깝게 기다려졌다.

음력 설을 지나고부터는 거의 날마다 창문을 열고 뜰을 내다보며 다가오는 봄 기운이 느껴지지 않나 발돋움하는 마음으로 나뭇가지들을 살핀다. 특히 요즘에는 우리가 이사를 오자마자 바로 앞뜰에 심은 다섯 그루 벚나무에 온 관심을 집중하고 있다. 검은 표피를 가진 나무에 단엽(單葉)의 흰 벚꽃이 핀다는 종류인데, 그때는 외국에 머물러 있던 집 아이가 특별히 희망해서 심은 것이다. 7년생인가, 8년생이라는데 우리 뜰로 옮겨질 때는 잎이 무성했었다. 그런데 3월이 다 가도록 그 나무 빈 가지에는 꽃을 준비하는 징후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뭔가 잘못된 것이 아닐까 걱정을 하고 있자니, 4월에 들어서서야 이윽고 가지마다 조그만 새순들이 돋아나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저것이 꽃눈일까 잎눈일까? 꽃이기에는 너무 늦은 것 같았다. 궁금해서 아무리 들어다 보아도 이런 방면에는 철저하게 문외한인 나의 감식 안으로는 알 길이 없다. 다른 곳의 벚나무에는 꽃이 벌써 흐드러지게 피기 시작했는데, 이 봉오리들은 아직도 너무 작아서 터질 기미를 전혀 보이고 있지 않다. 나무를 심어준 업자에게 전화를 걸어 물어보니, 작년에 이식한 것이라 올해는 좀 늦을 수도 있다는 막연한 대답만 했다.

그까짓 꽃 하나 피든 말든 왜 이렇게 안달일까? 스스로도 자신의 변화에 어이가 없다. 자연을 가까이 느낄 수 있는 곳으로 와서 그런가? 정신적으로 한가한 시간이 늘어서인가? 한 선배는 뜻밖에 그럴 때가 된 내 나이 탓이라고 한다. 그러고 보면 이런 변화는 흙 냄새가 그리워지는 것으로부터 시작됐다. 꽃이 피기를 기다리는 이 감정이 장차 내가 돌아갈 곳에 대한 갈증을 나타내는 징후의 하나라면 아직은 조금 서글프다.

오늘은 새벽부터 비가 봄비답지 않은 기세로 후줄근히 내린다. 거실로 나가 유리창 너머로 뜰의 벚나무를 다시 살펴보았다. 아직 어둠이 채 가시지 않아 확실하지는 않지만 어떤 새 소식도 없어 보인다. 섭섭한 마음으로 돌아서는데 ‘모란이 피기까지는’이라는 김영랑의 시 구절들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