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치 마을

                                                                                             林億圭

 용담(龍潭) 댐 공사로 어수선한 내 고향, 댐의 하류에 있는 마을 주민들은 이미 이주를 했으나 상류는 금년으로 농사가 마감된다는 것이다. 어쩌면 고향 마을에서는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할아버지 제사에 참례하려고 길을 나섰다.

예정보다는 늦은 시간에 집을 나와 고속버스 터미널에 가니 전과는 달리 붐비지 않는다. 대기라도 해놓은 듯한 버스에 오르니 좌석이 반도 더 비어 있다. 이것도 IMF의 한 단면을 보이는 것이려니 싶어 서글프다. 그래서인지 차 안이 가라앉은 느낌이요 승객들의 표정도 밝지 않은 것 같다.

얼마를 달렸을까. 잿빛 논밭이 펼쳐진 건너편에 회색 무늬로 얼룩진 푸른 산이 다가섰다가는 물러나기를 거듭하는데 눈을 들어 새털 구름으로 수를 놓은 하늘을 본다. 훤하게 트인 창공에 떼지어 나는 한 무리의 새라도 있음 직한데 오늘은 그런 것마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가까운 산은 빠른 걸음으로 스쳐가고 먼 산은 느긋하다.

왼편 산기슭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여남은 그루의 미루나무가 헐벗은 가지 위에 까치집을 안고 서 있다. 까치들이 모여 마을이라도 이루어 놓은 것일까. 짝을 지은 한 쌍의 까치가 오손도손 새끼 몇 쌍쯤은 길러냈을 그런 까치집들이다. 어느 집이 더 크고 어느 집이 더 작지도 않은 까치집, 미루나무의 가지 사이에 둥지를 틀었으나 꺾이거나 휘어진 가지 하나 보이질 않는다. 미루나무들도 그런 까치들의 집을 사랑으로 떠받들고 있을 거다.

어릴 적에 까치가 집 짓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이른 봄, 까치 두 마리가 마른 나뭇가지를 열심히 물고 와서는 이리 끼우고 저리 맞추는 것이다. 저이들 조상 대대로 물려오는 공법에 따라 짓는 집이어서 물고 온 나뭇가지를 금세 끼워놓고는 또 다른 것을 가지러 간다. 그 작은 입으로 물고 오면서도 여간해서는 떨어뜨리는 실수가 없다. 제 분수에 맞는 것만을 물고 오기 때문이리라.

어쩌다 입에 문 나뭇가지가 생나무 가지에 걸려서 떨어뜨리는 경우를 한두 번 본 일이 있긴 하나 그것을 주워 올리려고 하지 않는다. 어떤 금기라도 있는 것일까. 이렇게 지어 놓은 집을 까마귀한테 빼앗기는 경우가 있다. 까치에게는 참으로 서러운 일이다.

까치들은 잔가지가 더덕더덕 붙었거나 가시가 있는 나무에는 물론, 겨울에 햇볕 한 조각을 나누어 주지 않는 나무에는 집을 짓지 않는다. 여름에는 시원한 그늘을, 겨울에는 따스한 햇볕을 나누어 주는 나무라야 둥지를 튼다. 저 미루나무들이 그런 나무들이다.

그런데 지금 저 까치 마을에는 까치가 눈에 띄지 않는다. 한두 마리쯤 남아서 마을을 지킬 법도 한데, 집을 온통 비워놓고 어디를 간 것일까. 집단을 이루었으니 까마귀가 온다 한들 감히 집을 뺏으려 하지는 못할 것이라고 믿는 걸까. 집안에 거창한 살림들을 들여 놓았거나 먹을 것을 수북히 쌓아둔 것도 아닐 테니 쥐가 썰거나 먹어 치울 일도 없다. 아직은 알을 낳거나 어린 새끼가 없으니 족제비나 뱀 같은 긴 짐승에게 당할 걱정도 없으리라.

하기사 내 어릴 적만 해도 우리 마을에서는 어느 집이고 사립문에 빗장을 치고 잠그지 않았다. 살짝 밀어 닫아 집안에 사람이 없다는 것을 표시해 놓을 뿐이다. 방문에 자물통을 채우는 집도 없었다. 우리 집에도 녹슨 자물통이 하나 있긴 했으나 고양이가 드나들지 못하도록 광문 문고리에 걸어 놓는 것에 불과했다.

까치들은 어디를 갔을까. 저 많은 집들을 버리고 다른 곳으로 집단 이주를 한 것은 아닐 텐데, 먹을 것을 찾아 논밭으로 일을 나간 것일까. 아니면 양지 바른 언덕으로 봄 마중이라도 나간 것일까. 입춘이 지난지 오늘이 꼭 보름이 되는 날이다.

까치는 말수가 적은 새다. 참새처럼 인가의 처마 끝에 깃들여 살면서도 사람의 눈치나 살피는 그런 새가 아니다. 그렇다고 까치들은 사람들과 아주 가까이 하지도 않는다. 가까운 경우라야 사립문께 가죽나무에 집을 짓거나 동구 밖에 서 있는 미루나무 아니면 뒷동산 참나무 가지 사이에 지어 놓은 작은 집으로 만족한다.

맑은 날 아침, 고향의 까치들은 외삼촌 같은 반가운 손님이 오실 것을 알려주고 시집간 누님이 근친올 것을 알려주기도 한다. 일제 때는 멀리 징용 가 있던 형님들의 편지가 올 것을 알려주기도 했다.

까치가 노는 마을, 평화로운 저들의 세계에 불신이라는 것이 있을 리 없다. 지금 나는 그런 고향 마을을 찾아가고 있는 것이다. 내 고향에는 까치집이 많고 고향 집 또한 까치집 같았다. 그랬다. 까치집 같은 초가가 옹기종기 모여 있던 그런 마을, 내 고향 마을이 까치 마을이었다.

주먹만한 자갈이 깔린 신작로를 따라 달리다가 꼬불꼬불 고개를 넘고 물을 건너 들길 따라 조심조심 내려가면 거기에 내 고향 마을이 있다. 국사봉(國師峰)에서 뻗어 내린 어머니 품처럼 아늑한 동산 자락 위에 앉은 고향 마을, 마을 앞에는 작은 들이 있고, 들을 지나 안산 밑에서 여울지는 정자천(程子川)과 국사봉을 감싸며 흘러온 뒷내가 맑다. 운장산(雲長山)에서 발원한 이 두 줄기 물은 앞뒤 들을 추기면서 흘러내려 독선 거리 동구를 지나 신들 앞에서 어깨동무를 하고 금강(錦江)으로 내닫는다.

거기 금강과 주자천(朱子川)·안자천(顔子川)이 어울리는 용소(龍沼)가 있는 땅에 물을 가두는 것이다. 금강 물이다. 아! 금강! 긴 자락 뉘이면서 곰나루를 백마(白馬)로 달려가 구비진 역사를 노랫가락으로 푸는 금강을 가로막아 그 맥을 자른다는 것이다.

평화로운 마을에 슬레이트 바람이 불어와서 까치집 같은 초가의 지붕을 걷어내더니, 삼십 년이 지나서는 자갈길 신작로에 아스팔트 포장 바람이 불어왔다. 물에 잠길 운명의 날을 앞에 두고 불어온 바람이다. 산(山)사람들이 자갈길을 딛느라 설레던 가슴을 달랠 겨를도 없이 탯줄을 걷어야 하고, 고향을 물 속에 잠가 둔 채 떠나야 하는 수몰민들, 이웃 사촌간이 이산해야 하는 그 아픔은 어찌하려나.

인간들이 즐기는 개발의 등쌀이 저 산기슭에서 기승을 부릴 어느 날을 상상해 본다. 저 미루나무들이 앞으로 얼마 동안이나 저대로 서 있을까. 마을을 잃고 집을 잃고 우왕좌왕할 까치들이 그들만의 울음을 울다가 한 밤 지나고 두 밤 지나면 어디론가 사라지고 말 그런 날이 오고 말리라. 미루나무의 밑둥을 자르고 뿌리를 파내어 까치 마을을 송두리째 파괴하면서까지 욕심을 채우려는 인간이 있는 한 말이다.

까치 마을이 오래오래 평화로운 마을이기를 바라는 것은 한낱 꿈일 뿐이다.

 

 

 

임억규

수필문학, 수필공원으로 등단. 한국수필문학진흥회 부회장.

수필집 『눈이 오는 토요일』, 시조집 『종이학을 접으며』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