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수저

                                                                                            정선모

 못 견디게 아버지가 그리운 날은 은수저를 닦는다. 치약을 행주에 묻혀 은수저를 힘주어 닦으면 보얀 은빛이 살아나면서 손잡이 끝에 있는 푸른빛 글자도 선명해진다. ‘기쁠 喜’ 자를 모양내어 새긴 걸 보면 딸을 여의는 친정어머니의 기원이 얼마나 절실한지 짐작할 수 있다. 남편이 쓰고 있는 이 은수저는 바로 친정아버지가 사용하시던 은수저를 녹여 만든 것이다.

혼수를 장만하느라 경황이 없으셨을 텐데 어느 결에 준비하셨는지, 신행을 마치고 먼 곳으로 신접 살림하러 떠나는 날, 친정어머니는 내 손에 두 벌의 은수저를 꼭 쥐어주셨다. ‘아버지 마음도 따라가는 거야, 잘 살아야 해.’ 아버지 대신 오빠 손을 잡고 결혼식장에 들어서야 했던 내가 퍽 안쓰럽기도 하셨을 것이다. 아버지를 유난히 따랐던 딸이 반려자를 따라 먼 길 나서는 걸 보며 어머니는 얼마나 걱정이 많으셨을까? 은수저가 무슨 수호신이라도 되는 양 자줏빛 보드라운 우단으로 감싸 건네주시며 잘 살아야 한다고 눈시울 붉히신 채 거듭거듭 당부하셨던 것이다. 아버지는 그렇게 신혼살림부터 줄곧 우리와 함께 하셨다.

예전에는 왜 그리도 은수저를 훔쳐갔을까? 모두들 어려웠던 시절, 안방에 온 가족이 모여 시끌벅적 이야기꽃을 피우다 식사 준비하러 나가신 어머니의 비명 소리가 들리면 또 은수저가 사라진 것이다. 그럴 땐 으레 부엌 뒷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머리 끝이 쭈뼛거려 한동안 부엌 근처에도 얼씬거리기 싫어진다. 은수저를 잃어버리고 상심해 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뵙는 것은 고역이었다. 아무리 형편이 어려워도 며칠 안 가 그예 아버지의 은수저만은 마련하셨던 어머니, 설거지를 마친 후 은수저를 감추기에 골몰하시던 어머니 모습이 어제인 듯 떠오르는데…….

예나 지금이나 훔친 물건을 어디 제값 주고 팔 수 있겠는가. 고작 쌀 두어 봉지 사면 그만일 것을. 기껏해야 남이 받아 먹던 수저를 탐내던 이들이 골목을 기웃거리던, 가난했던 시절이 분명히 있었다. 창문 밖에서 기다란 막대기로 벽에 걸어놓은 오빠의 코트까지 꺼내가던 때였으니 은수저는 충분히 훔칠 가치가 있는 물건이었으리라.

몇 번이나 분실한 끝에 어머니가 마음먹고 새로 장만한 은수저는 닳도록 쓰여지지 못하고 주인을 잃었다. 겨우 죽이나 미음을 담아 주인의 입에 날랐고, 그나마 돌아가시기 전에는 물 한 모금 넘기기도 힘드셨으니 품위 있는 모양새에 비해 제 소임을 다하지 못하던 은수저였다. 아버지의 깊어가는 병세만큼 윤기를 잃어가는 은수저가 보기 싫어 가끔씩 수세미로 박박 밀어 대기도 하였는데…….

결국 아버지는 우리 곁을 떠나시고 은수저만 남았다. 남겨진 은수저는 1년 내내 찬장 속에 머물다가 아버지 기일이 되어서야 바람을 쏘이곤 했다. 음식을 담아 나르지 않는 수저는 이미 수저가 아니다. 그저 이리저리 제삿상에 차려진 음식 위에 슬쩍 올려지다 맛난 음식 한 번 떠보지도 못하고 거두어지는 하릴없는 은수저에게 어머니는 새로운 임무를 부여하신 것이다.

오남매 중에서도 유난히 날 귀애하시던 아버지는 마음껏 사위감을 골라 가끔씩 술대접을 받고 싶어하셨다. 호탕한 성품이셨던 아버지께서 술을 드신 날은 우리들의 보너스 날이기도 했다. 골목에서부터 우리를 부르시는 기분 좋은 아버지 음성이 들려오면 우르르 달려나가서 아버지 팔을 하나씩 차지하곤 의기양양하게 대문을 열어 젖히던 단발머리 꼬마였던 나와 동생. 일부러 이쪽저쪽 기우는 척하며 우리에게 온몸을 실어보는 장난도 하셨던 아버지. 넘어지지 않으려고 고 작은 팔로 아버지를 힘껏 받치던 그립고도 그리운 어릴 적의 내 모습. 땅바닥에 넘어져도 좋으니 다시 한 번 아버지를 부축할 수만 있다면……. 싫다고 고개 돌리는 우리의 얼굴을 커다란 손으로 감싸고는 까실한 수염자국 부비며 술 냄새 후후 불어 대던 아버지, 지금 그런 장난을 걸어오신다면 어떤 냄새를 풍겨 대어도 절대로 고개 돌리지 않을 텐데……. 평소엔 호랑이처럼 무서워 감히 투정 한번 마음껏 부려볼 엄두도 내지 못했지만 술을 드신 날은 예상치도 않은 장난을 걸어와 집이 떠나가도록 웃음보가 터지게 만들어 놓곤 하셨다.

단단했던 근육이 독버섯처럼 번지는 암세포 때문에 앙상해져가는 참담한 고통을 겪으시다 그예 목숨줄을 놓아버리신 아버지, 젊으셨을 때 마을의 씨름대회에서 몇 번이나 송아지를 타오실 정도로 힘이 장사였다면서 한 손으로도 거머쥘 작은 세포 덩어리 하나 이겨내지 못하고 그렇게 홀연히 가버리시다니…….

아버지를 추억할 만한 물건이 어쩜 그리도 남아 있지 않은가. 아직 세상 물정 모를 때이기도 했지만 평생 아버지의 손에서 떠나지 않던 손때 묻은 연장 하나 챙겨놓지 못하고 이제서야 안타까워하다니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일이다.

그런데 생각지도 않던 귀한 물건이 혼수에 얹혀 내게로 온 것이다. 소금 독에도 숨어 있고, 포개 놓은 바가지 속에도 들어 있던 은수저가 새롭게 단장되어 소꿉 같은 새살림 한가운데에 자리를 잡았다. 먼저 주인의 기운 없는 손놀림에 익숙해져 있을 은수저는 이제 남편의 건강한 일상을 책임지게 되었다. 그토록 벼르던 사윗감은 술 한 잔 못하지만 식성은 누구 못지않아 은수저는 자연 바쁘다. 맛나게 식사하는 그이를 보며 젊은 날의 아버지를 떠올린다. 그리고 딸을 출가시키며 마음 한 자락 더 얹어 보낼 욕심에 오래 된 은수저 둘둘 말아쥐고 금은방을 들어서시던 어머니의 모습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