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 만남

                                                                                             이옥란

 산기슭을 오르다가 은대난초를 보았다. 키가 겨우 한 뼘이나 될까. 흰 꽃송이가 쪼르르 총상으로 매달려 있다. 산 그늘에서 자란다는 은대난초를 보기는 처음이어서 반가운 마음에 가슴이 떨려왔다. 은대난초의 키가 나지막해서인지 내가 눈을 멀리 산허리께 맞추고 걸어갈 땐 그 꽃이 보이지 않더니, 산기슭을 기다시피 오르자 바로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무심히 지나치면 가까이 있어도 보이지 않다가 마음을 열고 여유를 가지고 보면 정면으로 마주치는 산꽃들, 환한 미소를 짓는 산꽃들을 보면 피로가 싹 가신다.

은대난초 꽃송이가 흔들리자 내 몸도 함께 흔들린다. 갑자기 머리 위에서 까르르 웃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올려다 보니 쪽동백이 조롱조롱 피어 장관이다. 회녹색의 큰 잎도 아름답지만 가지 끝에 총상으로 달려 아래를 향하고 있는 흰 꽃송이들은 마치 작은 종을 가득히 매달아 놓은 것 같다. 바람이 불 때마다 흔들려 종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혼자 보는 게 아까워서 문득 좌우를 돌아보았다. 주변엔 아무도 없고, 나는 슬며시 마음을 가라앉힌다. 내 마음이 어느 새 산 속을 빠져 나가 도심의 번잡함과 소음을 끌어들이려고 한 것 같아 멋쩍었다.

흔들리는 잎새를 타고 투명한 녹색 바람이 불어온다. 혼탁한 공기로 꽉 찬 도심의 가슴을 마알갛게 비워주는 바람이다. 피톤치드가 내뿜는 방향물질 때문에 몸과 마음이 맑아진다고들 하는데, 그런 전문적인 것은 잘 모르더라도 내 몸은 금세 한 바퀴 맑은 공기가 순환하여 쾌적해진다. 피톤치드라는 녀석이 발가락과 손가락을 뻗어 사방으로 돌아다니는 것 같아 주위를 돌아다보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니 그저 모르는 척하고 나는 이 신선한 바람과 푸른 잎들을 배경으로 핀 산꽃과의 만남을 즐기며 잠시 휴식을 취한다.

김소월의 시에서처럼 ‘산에 피는 꽃은 저만치 혼자서 피어’ 있다. 어릴 때 무심코 외운 시 구절이 어쩜 이처럼 들어맞을 수가. 그 시에서 산에 피는 꽃이 참으로 아름답다든가 향기와 빛깔이 강하다는 등의 말은 하지 않고 있다. 산에 피는 꽃은 저만치 혼자서 피어 있고,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속 피고 지고, 지고 핀다는 말뿐이다. 산길을 오르다 산꽃을 볼 때마다 참 적절한 표현이라는 생각이 든다.

고적한 산 속의 꽃은 참 아름답다. 아니 어쩌면 인가의 크고 화려한 꽃에 비하면 초라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녹색으로 둘러싸인 산에서 보는 산꽃은 화원에서 보는 꽃의 아름다움에 비할 바가 아니다. 산에서 꽃을 만나는 순간 도심의 빌딩 숲 사이에서 조경으로 심어진 꽃에게 하던 여러 가지 찬사는 다 사라져 버린다. 산꽃이 아름답지 않아서가 아니라 산꽃과 마주치면 그 많은 아름다운 말들이 떠오르지 않는다.

산꽃을 보면 아름답다는 말보다도 먼저 그 만남의 감동이 온몸으로 전해 온다. 산에서 만난 꽃은 그냥 꽃이 아니라 눈을 가진 얼굴로 보인다. 산을 오르면서 저만치 혼자 핀 꽃을 보면 꽃은 우리를 치장해 주기 위해, 우리를 즐겁게 해주기 위해 있다는 생각이 그만 사라져 버린다. 꽃이라기보다 같은 생명체로서의 동류애를 느끼기까지 한다. 꽃이 눈을 떠 나를 바라보며 말을 건네는 것만 같다.

처음에야 나도 무슨무슨 산을 몇 시간만에 주파했다는 식의 등산을 했지만, 요즈음은 잘 닦여진 길을 따라 허겁지겁 가는 유명한 산은 피하고 일부러 인적이 드문 산을 잘 찾는다. 조용히 산꽃을 감상하는 즐거움을 누리기 위해서다. 이젠 등산이라기보다 산행이라고 고집하면서 산의 이 꽃 저 꽃을 보느라 높지 않은 산도 오래도록 헤매고 다닌다. 멀리 있는 산꽃을 가까이 보려고 길을 벗어나기도 한다. 산에서 피는 꽃은 소월의 시에서 말해 주듯 봄, 여름, 가을 계속 이어서 핀다. 같은 계절이라도 산의 꽃들은 열흘이 멀다 하고 바뀐다. 그래서 나는 계속 그 산꽃들과 만나고 산꽃들은 산길을 동행하는 내 좋은 친구가 된다.

산 속에서 사람을 만날 때도 도심에서 만날 때와는 다른 느낌이 된다. 잠시 쉬어가는 길목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눌 때도 사람 탐색 같은 것은 하지 않는다. 말로 자신을 설명하는 만남이 아니라 산꽃을 대하듯이 서로를 느끼는 만남이다. 대등한 인격으로 마주 바라보는 만남이다. 때로 강인한 산꽃처럼 고집이 있어 보이기도 하는 산사람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은 자신의 방식을 남에게 고집하지 않으며 상대방의 산 취향을 부수려 들지 않는다.

도심에서 우리의 만남에는 얼마나 많은 타인의 시선이 끼어 있으며, 억지로 만들어지는 만남이 얼마나 많은가. 앞을 바라보고 있으면서도 뒷모습을 생각하고, 마주보고 있어도 옆눈으로 위아래를 재어본다. 나도 그런 세속적인 만남에 젖어 있어서 산꽃의 해맑은 얼굴과 정면으로 마주치는 순간 그 순수한 모습에 가슴이 떨린 것은 아닐까.

각자의 길이 있되 남의 길을 간섭하지 않고 넉넉한 마음으로 제 몫의 자리를 누릴 줄 아는 것들, 자연스럽고 나름대로 그 깊이와 선량함이 있는 것들, 내가 산 속에서 만나는 모습들이다.

산길에서 마주치는 산꽃들, 이따금 인사말을 건네는 산사람들, 새 소리, 바람 소리. 나는 아무런 가식이 없는 이런 투명한 만남이 좋아 즐겨 산길을 간다. 온통 녹색빛에 물이 들어서 산길을 걸어가면 저만치 걸어가고 있는 진솔한 내 모습과도 만나게 된다.

 

이옥란

계간수필로 등단(97년).

부평고등학교 교사(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