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회 추천-

부운재(浮雲齋)

                                                                                             심규호

 부운재는 뜬구름마냥 한가롭게 거하는 방이란 뜻이기는 하나, 혹 남도 어느매 고절한 곳에 자리잡고 있는 옛 선비의 공부방이나 모모거사의 선방으로 생각할지 모른다. 더군다나 시끌벅적한 종로 한 모퉁이 인사동에서 뜬금없는 여물통이나 한지 몇 겹 발라 장식한 찻집이거나, 왠지 고전적으로 티를 내고 싶은 허름한 술집으로 여기지도 아예 마시기를 바란다. 물론 옛 티나고 문득 전아한 느낌이 드는 부운재란 이름에 미혹될 수도 있는 일이기는 하나, 사실 그 이름이 ‘뜬구름 카페’의 한역(韓譯)일 뿐이다.

 

본래 그곳은 이전부터 지금까지 여전히 고고하기 이를 데 없고 오로지 학구적인 일만을 위해 제공된 대학교 교수 연구실이었다. 연구실의 주인은 한국사를 전공으로 하시는 분인데, 물론 처음부터 그분의 연구실이 카페처럼 시끌벅적한 곳은 아니었으며, 오히려 수도원 같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고즈넉한 분위기였다고 하는데, 실상은 정확히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바로 그 방이 80년대 중반부터 뜬구름 카페라고 불리우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이는 틀림없다. 왜냐하면 당시 연구실의 조교이자 명명자가 본인이었기 때문이다.

왜 뜬구름 카페인가? 우선 카페라는 말에는 전혀 깊은 뜻이 없다. 원래 프랑스어로 커피나 다방을 뜻하는 카페는 때로 바나 캬바레의 예전 이름으로 접대부가 있는 주점을 뜻하기도 했다. 그러나 뜬구름 카페는 말 그대로 뜬구름이란 이름을 지닌 다방, 다시 말해 더불어 어울리기와 이야기하기에 적합한 장소로서 차도 마실 수 있는 곳이라는 뜻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왜 하필 뜬구름인가? 이 역시 심오한 뜻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당시 연구실은 대학 도서관 4층에 자리잡고 있었다. 어느 날 저녁 어스름, 붉은 노을이 하늘가를 물들이고 일순간 주위가 정적에 휩싸였다는 느낌이 들 즈음, 멀리 창 밖으로 보이는 서울의 뜬구름이 문득 어떤 의미가 되어 내게로 다가왔다. 그날 밤늦게까지 지속된 술자리에서 ‘뜬구름’이 좋은 안주거리가 된 것은 물론이었다. 술자리를 같이 한 몇몇 동조자들은 당시에 그 연구실의 주인이나 드나들던 객들이 고민하고 희망하는 것이 뜬구름 잡은 것처럼 때로 황당한 듯하면서도, 그 맑고 고움이 푸른 하늘과 절절하게 어울리는 뜬구름 같다는 점에 공히 찬동하였다. 이리하여 불경스럽게 대학 연구실에 카페의 명패를 다는 일이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이렇게 어느 날 갑자기 ‘뜬구름 카페’는 세상에 나왔다. 그러나 이렇듯 사사롭게 명명되고 구체적으로 호명될 때까지 그 방의 주인은 전혀 눈치를 채지 못하고 있었다. 이윽고 사후 보고되었을 때, 주인은 꾸중보다 흥미를, 화냄보다 격려를 해 주었다. 패쇄된 곳보다 개방된 공간이 더욱 큰 역량을 지닐 것이라는 말과 함께. 다행이었다. 자칫 개점하기 무섭게 문을 닫을 뻔하였는데.

명색이 카페이니 약간의 설비와 마실 것, 그리고 일한 사람들이 있어야 했다. 그러나 전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 조교인 내가 지배인 겸 주방을 맡고, 이른바 여종업은 이미 책상 하나를 차지하고 공부를 하고 있던 여학생 한 명과 그녀의 친구들이 자원한 터였다. 주방을 대신한 캐비닛에는 오래 된 커피가 잔뜩이었고, 인삼차와 일본 차 약간 그리고 제목 미상의 붉은 액체(나중에 그것이 오미자 술임이 밝혀졌다)가 이미 마련된 상태였다. 물론 전기 포트도 있었고, 작고 둥근 커피잔 서너 개와 두 개의 티스푼이 마련된 상태였다. 특히 작은 커피잔은 한 스푼의 커피와 설탕으로도 능히 달고 쓴 커피 맛을 절감할 수 있는 이른바 다방 커피잔의 전형이었다.

분명 이름은 카페였으나 마실 것이 잘 팔렸던 것은 아니었다. 우선 주인부터 뜬구름 카페의 커피(이른바 블랜드 커피)를 애용치 아니하였다. 물론 드시지 않은 것은 아니다. 레지나 때로 지배인이 직접 탄 커피를 가져다 드리면 ‘고맙다’고는 하시는데, 나중에 보면 반쯤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영 맛이 없었음에 틀림없었다. 그러나 걱정할 일은 아니었다. 분명 커피 맛에 문제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카페는 사람들로 북적거렸기 때문이었다.

들고나는 손님들 가운데 역시 제일 많은 이들은 학생들이었다. 물론 그 중에는 자신의 성적이 이렇게 나올 리가 없다고 주장하면서 확인을 부탁하는 황당한 학생도 있었지만(시험지 확인 결과 東學에 대해 논하면서 끝까지 同學이라고 한자를 애용한 결과 D가 나왔다. 물론 앞뒤로 빽빽하게 썼지만) 대개는 어떤 논의거리가 있어 들르는 학생들이었다. 이 외에도 이국 땅에서 오는 손님들을 비롯하여 각양각색의 객들이 편안하게 들고났다. 대화의 내용은 언제나 철저하게 공개적이었으며, 방에는 모든 이들이 서로에게 상대가 되었다.

흥미로운 것은 시끌벅적한 분위기에서 여러 이야기가 나누어졌지만 마지막에는 항상 민족 문제로 귀결된다는 점이었다. 그것은 부운재 주인의 관심이 바로 그 문제에 집중되어 있다는 점과 객들 또한 이에 흥취를 지닌 이들이었기 때문이었다. 때는 여전히 민주가 담론의 중심이 되는 시대였지, 민족의 시대는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또 하나 흥미로운 일은 뜬구름 카페의 말은 때로 행동의 씨가 되었다는 점이다. 아시다시피 어디 말만으로 문제가 해결되던가? 그러나 또한 말이 잘 여물면 실천이 따르기 마련이다. 어느 겨울 날, 우리 땅의 막내 독도로 떠나 지신밟기를 한 것이나, 한·일 농촌 우정문화 교류를 한 일, 국민학교라는 이름을 바꾸는 일 등등 구체적인 실천의 모태가 된 것 역시 부운재, 우리들의 뜬구름 카페에서 이루어진 말들이었다.

이렇듯 부운재는 시끄럽게 떠드는 사랑방이었으며 학문에 대한 탐욕의 장이었고, 또한 말이 생명을 얻는 태반(胎盤)이었다. 그리하여 영글어가는 가을날의 따사로운 햇빛이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지금 뜬구름 카페는 사라지고 없다. 내가 5년간의 지배인 생활을 끝내고 자영을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을 때, 부운재의 주인께서 뜬금없이 영어(囹圄)의 몸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부운재는 풍비박산되어 말 그대로 뜬구름처럼 사라지고 사람들도 어디론가 멀리 떠나고 없다. 그러나 그럴까? 지금 생각하면 뜬구름 카페가 과연 진짜로 있었나 싶기도 한데… 어디 뜬구름이 일정한 장소만을 떠다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