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회 추천-

조각난 사진

                                                                                                 박용화

 잔잔하게 스며드는 감미로운 음악처럼 그는 나에게로 왔다.

뭔가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 클래식 기타 학원에 등록하고 날마다 기타를 안고 다니던 시절이었다. 클래식 기타의 애절하고도 청아한 음률이 은은한 정서를 자아내며 나를 그 속에 몰입케 했다. 고요한 교실의 딱딱한 나무의자에 앉아 한 음 한 음 배워 나갈 때의 신선함이란, 나는 까닭 모를 방황의 끝이 여기가 아닐까 싶은 느낌을 받았다. 그가 내 앞에 나타난 것은 바로 그때였다. 우연히 마주친 그를 본 순간 전율을 느꼈다. 우수에 젖은 듯한 표정이며 초췌한 모습은 순수만을 추구하던 스물한 살의 나에게 모든 열정을 쏟아붓게 했다.

수없이 많은 곡을 다룬 후 그가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을 연습하고, 내가 ‘라리아네의 축제’를 유연하게 연주할 즈음 우리의 정은 상당히 깊어져 있었다. 부산에서 태어난 우리는 그 도시 여기저기에 무수한 흔적을 남겼다. 억수같이 비가 쏟아지던 날, 해운대 어느 호텔 커피숍의 탁 트인 창으로 바라보던 바다는 따뜻한 커피 향기와 더불어 우리에게 숨막힐 듯한 행복을 안겨주었다.

그 즈음엔 강의가 끝나면 성지곡 수원지를 자주 찾았었다. 입구로부터 길을 따라 걸어가면 수없이 많은 키 큰 나무가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쉬어 가라는 듯 곳곳에는 벤치가 정적의 분위기 속에 자리하고 있었다. 꼬불꼬불한 골짜기를 따라 한참 걸어가면 호수가 나온다.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바라보던 호수의 정경은 마치 그와 내가 한 폭의 그림 속에 있는 듯한 착각이 들게 했다. 평소 사진에 관심이 많았던 우리는 자연이 뿜어내는 환상적인 풍광을 카메라 렌즈에 담기에 여념이 없었다.

방황을 거듭하던 20대 초반, 그가 곁에 있었기에 조금은 덜 외로웠다. 그리고 몹시도 춥던 1월의 어느 날 결혼을 했다. 하얗게 쌓여오던 눈을 밟으며 상상하던 미래는 나를 행복 속에 흠뻑 빠져들게 했다. 그러나 감미롭기만 하던 시절은 짧게 흘러가 버리고 충돌은 여과 과정 없이 밀어닥쳤다.

자수성가한 아버지 덕분에 풍족한 유년 시절을 보냈던 그는 세상물정에 어두웠고, 언제나 자신밖에 모르는 이기주의자였다. 그리고 나 또한 결벽증과 완벽주의로 자만과 이기심에 가득 차 있었다. 연애 시절 그토록 낭만적으로 느껴졌던 그는 결혼생활 내내 현실을 망각한 모습으로 아내인 나를 위협하기도 했다.

갈등의 틈바구니에서 타협의 실마리를 찾지 못한 채, 철없는 남편과 아내는 함께 있으면서도 늘 따로 일 수밖에 없는 외로움으로 제각기 가슴을 썩히면서 살았다. 하루의 일과가 끝나면 베란다 쪽에 놓여 있는 등나무 흔들의자에 몸을 기대어 끝없는 상념에 빠져들곤 하는 게 내 유일한 낙이었다. 어느 날엔가 저녁 찬거리를 사러갔다가 거리에서 한 여자를 보았다. 꿈과 희망을 잃어버린 듯한 서글픔이 감도는 그런 여자였다. 순간 황량한 바람이 스쳤다. 그녀는 다름 아닌 상가 쇼 윈도에 비친 바로 나 자신이었던 것이다. 나의 결혼생활은 그렇게 일그러져 가고 있었다.

언제나 나만을 위해 존재할 것 같았던 남편이 처음 외박하던 날, 온갖 상념이 교차되어 앨범을 펼쳤다. 내면에서 끓어오르는 분노와 슬픔은 손에 쥐어진 사진을 향해 표출되기 시작했다.

“결혼이란 당신들이 혼신의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되는 사업이다”라고 한 입센의 말이 생각났다. 그렇게 서로가 최선을 다하지 못한 채 쌓아두기만 했던 작은 갈등의 알갱이들이 커다란 바위가 되어 벼랑 끝으로 구르고 있었던 것이다.

추억을 지우듯 사진을 갈기갈기 찢기 시작했다. 계획 없이 시작된 나의 사진 찢는 작업은 계속 이어지고, 결국 앨범에 고이 꽂혀 있었던 사진은 모두 조각조각으로 찢어진 채 무릎 앞에 쌓이게 되었다. 그 조각들은 그와 내가 공유했던 추억의 흔적들이었다. 이미 앨범을 펼치기 전부터 흘러내리던 눈물은 흐느낌으로 변하고 있었다.

아픔의 시간을 어떻게 보냈는지… 어느덧 세월은 흘러 지난날의 번민과 고통이 희미하다. 기타와 함께 다가왔던 사랑은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라는 뼈저린 아픔을 체험하게 했지만, 그 철없는 사랑의 성숙으로 한 인간으로서의 완숙미를 갖게 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집안 가득히 스며드는 햇살을 더없이 사랑한다. FM 클래식 방송에 주파수를 맞추고 제멋대로 어질러진 집안을 정리한 후 잔잔히 흐르는 선율에 젖어 추억으로의 여행을 한다. 이미 앨범 속의 사진은 찾아 볼 수 없지만, 지난날 함께 했던 그 모든 추억은 우리 부부의 가슴에 언제까지나 영상으로 남아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