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세론과 예언서

                                                                                                   공덕룡

 금년은 20세기 말년, 이 해를 넘기면서 21세기에 접어든다. 뿐만 아니라 천년을 단위로 하는 밀레니엄 원년을 맞이한다. 그리스도 재림 후의 지복(至福)의 천년 ─ 그 첫해가 다가오고 있다.

이런 고비를 넘길 때마다 이른바 ‘오컬트 붐(Occult boom)’ 현상이 머리를 든다. 신령이 현신하거나 초능력자가 배회하거나 예언자가 등장한다. 영화 ‘사랑과 영혼’을 보면 저승의 남자가 이승의 애인에게 접근하지만 그의 실체는 보이지 않으므로(영화에선 보이지만) 초현실적 교감(交感)으로 남녀의 관계는 이어진다.

기독교에서는 ‘심판’이니 ‘말세’니 하는 말이 예사로 쓰여지는데, 세기말에는 이 말의 의미가 강조되고, 듣는 편에선 귀가 솔깃해진다. 이런 것을 세기말 현상이라 한다던가.

‘천년지복’이라지만 재림주가 강림하신 해부터 시작한다. 천년기(千年紀)가 되었으니 오실 때가 됐는데 아직 소식이 없다. ‘때와 기간은 너희들이 알 바 아니요’(행 1 : 7), ‘날과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아버지만 아시나니’(마 24 : 36), ‘생각지도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마 24 : 44)  ─ 이렇게 뜸만 들이시니 답답하기 이를 데 없다. 무작정 기다릴 게 아니라 우리가 일방적으로 재림의 날을 정해 놓고 재림주에 통보하자 ─ 이런 발상에서 ‘92년 10월 28일’을 최종일로 잡았다. 우리 나라 영생교의 경우이다.

이웃 나라 오움교의 아사하라(麻原彰晃)라는 교주는 무슨 신통력을 가졌던지 많은 사람들을 홀려 종말로 유혹하였다. 사린이라는 약물을 지하철 차내에 뿌려 무더기 인명 손상을 빚어냈던 것이다.

미국의 윌리엄 밀러(1782~1849)라는 선교사는 종말을 1843년으로 잡았다. 당시 뉴욕헤널드지는 밀러의 말을 그대로 인용하여 ‘1843년 4월 3일, 불벼락을 맞는다’고 보도하였던 것이다.

그날이 오자, 뉴잉글랜드 지방에서는 이 세상 종말을 기다리는 수천 명의 인파가 산 위에 모였지만 무슨 종말 같은 것은 없었다. 다급해진 밀러는 날짜를 4월 22일로 수정하였다가 다시 그해 10월 22일로 연기하였던 것이다.

그런데도 일부 눈먼 신자들은 먼저 죽어야 천당갈 수 있다고 믿은 나머지 최후 심판의 날을 기다리지 못하고 앞다투어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요새 말로 ‘못말려…’)

예언자 중의 거물은 프랑스의 노스트라다무스(1503~1566)이다. 그는 점성가고 철학자고 아울러 의사였다. 그 무렵 리옹 일대에 흑사병이 창궐하였는데, 의사로서 의술 봉사를 하여 인심을 얻었었다. 그러나 그가 명성을 얻은 것은 『百詩篇(Les Centuries)』이라는 예언서를 발간(1555)한 이후의 일이다.

점성학은 이 시대에 들어 절정에 올랐으니 때를 맞추어 세인의 관심을 끌었던가 싶다. 그의 생전에 몇 가지 예언이 신통하게 맞았으므로 그에게 쏠리는 신망은 더욱 높아졌다. 예를 들어 『백시편』 중 저 유명한 5장 33 시행(詩行)에는 낭트(Nante)의 수몰을 예언한 바 있다.

이 예언서는 초 롱셀러로 오늘날까지 면면이 판이 거듭되고, 그 해석서만 하더라도 수십 종에 이른다. 작년에 나온 『최종 해답서』에서는 『백시편』 중 ‘공포의 대왕’은 바로 재림하는 예수님이라는 그럴듯한 풀이를 하였다. 기독교식 사고방식으로 볼 때 천년기 말에 예수가 강림한다는 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발상이라 하겠다.

주목할 것은 재림의 시기가 ‘1999년 7월’이라고 못박아 놓았다. 두고 볼 일이다. 그런데 다른 대목에선 ‘나의 예언은 3797년까지 계속 되리라’ 하였으니, 어긋나도 실망하지 말고 기다리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풀이된다.

몇해 전 미국의 월간지 리더스 다이제스트 조사에 따르면, 당시에도 재림주를 자청하는 신흥 종교의 교주가 줄잡아 60명이 된다고 하였다. 그 중에는 한국의 신흥 종교의 교주도 들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세기말이 다가오는 요즘 그 수는 더 늘었으리라 짐작한다.

어느 학자는 “예언 중에 자기를 발견함으로써 자기 현시욕을 만족시키는 심리다” 하였다.

또 다른 학자는 멸망 예언이 이토록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지는 이유를 설명하여 “어느 시점에서 멸망하리라고 정해 놓으면 마음이 편해질 것입니다. 어찌 될지 모르는 불안을 안고 사느니 확실한 미래 쪽을 택하는 심리입니다. 설상 멸망이라 하더라도 마음이 놓이니까요”라고 하였다.

또 하나의 이유는 이 세상에서 소외감만 늘어나는 사람들에게 멸망은 단적인 해방이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혼자 죽으라면 억울타 하지만 ‘종말’이라는 공동 운명이라면 반가이 맞을 수 있지 않은가 ─ 이렇게 풀이할 수 없을까.

종말이니 예언이니 바깥세상은 세기말 삭풍에 휘말려도 국내에선 별 탈이 없을 것 같다. IMF 바람이 워낙 거세고, 세풍이니 총풍이니 별난 바람도 쐬고 나니 귀신 넋두리 같은 바람은 무섭지도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