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 혹

                                                                                                      金時憲

 익사 사건이 있었다. 20명쯤 되는 처녀들이 넓은 호수에서 뱃놀이를 했다.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었다. 열기가 높아지자 배가 균형을 잃고 기울어졌다. 감당하지 못하고 사람들은 모두 물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신문에 크게 보도가 되고 화젯거리가 되었다. 청춘이 아깝다고 했다. 시집도 가 보지 못했다고 했다. 물귀신이 탐을 냈다고도 했다. 이야기가 식어갈 즈음에 시인 유치환 씨의 산문이 잡지에 나왔다. 그 사건을 소재로 다루었던 것이다. ‘아름다운 죽음’이라고 표현했다. 노래하고 춤추는 순간에 갔으니 깨끗한 죽음이라 했다. 그러자 사람들은 유치환 씨를 비판했다. 시인의 화려한 말이기는 하지만 너무하다는 것이었다.

30년 전의 일이다. 나는 그때 유치환 씨의 사생관을 생각했다. 어떤 때에 사람은 떠나야 하는가를 유치환 씨는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서울로 옮겨온 지 9년이 되는 나는 그 동안 몇 사람의 친구를 만들게 되었다. 외로운 노후 생활에서 친구를 얻는다는 것은 보물의 획득이다. 그 중의 한 사람이 정선생님이시다.

그는 소탈하고 솔직하다. 마음에 있으면 감추지 않고 그대로 표현한다. 지금도 그는 강의를 하고 왕성하게 글도 쓴다. 생애에서 가장 행복한 때라고 말한다. 무엇에도 구애받지 않는 노후의 해방감이 좋고, 마음에 드는 적당한 일거리가 있어서 좋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이 가장 적기라는 말을 한다. 그가 말하는 적기가 무엇인가.

사람들은 행복해지면 그것을 유지하고 싶어한다. 권력, 명예, 돈이 그렇다. 미련이 놓지 않고 붙잡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는 행복하기 때문에 오히려 떠나고 싶단다.

카뮈는 수필도 썼다. 어떤 글에 꽃 이야기가 나온다. 눈앞에 있는 꽃을 바라보고 있으면 그 속으로 들어가고 싶은 충동이 온다는 표현이다. 소멸 충동이라고 할까. 대상과 하나가 되고 싶은 동화 감정이다. 왜 그런 감정이 오는 것일까.

기독교 신자는 하나님의 품안을 그리워한다. 아늑하고 포근하고 즐겁기 때문이다. 어릴 때의 어머니 품을 상상하면 수긍이 간다. 하나님의 품안을 그리워한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한다. 그곳에 영원한 행복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큰 대상에의 흡수 충동, 그것이 신앙인지도 모른다.

불교도 그렇다. 무심으로 돌아가라고 말한다. 무심은 곧 나의 버림이다. 나를 버리면 남는 것은 자연 또는 우주뿐이다. 그 우주 속에 내가 들어가는 것이다. 나의 무화(無化), 그것이 불교의 목표이다. 하나님의 품안에 안긴다는 기독교와 나를 버려 우주와 하나가 된다는 불교는 너무 닮았다.  

 

40대 때 나는 대구에서 살았다. 오포산이란 높은 언덕에 직장을 가지고 있었다. 열두 시에 그곳에서 오포가 분다 해서 오포산이란 이름이 붙었다. 그 산을 깎아 학교를 세우고 운동장을 닦았다. 나는 그 학교에서 10년 동안 근무했다. 때로 시간이 생기면 운동장 가의 울타리 같은 느티나무 아래를 거닌다. 높은 곳에 있어서일까 느티나무 잎은 항상 푸르고 넉넉하다. 그러다가 아래를 내려보면 먼곳에 대구 시가가 가로누워 있다. 길과 길, 집과 집, 그 사이에 끼어 있는 수많은 사람이 웃고 울고 찢으면서 살아간다. 고해의 소용돌이라고 할까. 그러다가 어딘지도 모르면서 먼길을 떠난다.

어느 날 나는 출근하느라 오포산 언덕 길을 오르고 있었다. 오월이었다. 다 올라가서 운동장 가에 머무렀을 때 예상하지 않았던 충격이 왔다. 푸른 느티나무 잎 때문이었다. 한꺼번에 다가온 푸른 잎의 무더기가 가슴을 꽉 채워오는 것이었다. 순간 ‘이대로 죽고 싶다’는 충동을 받았다. 그때의 감정을 나는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왜 그런 감정이 왔던 것일까. 더 나아갈 수 없는 지극한 자리에서 소멸 충동이 오는 모양이다.

지금은 5월의 끝에 이르렀다. 이른 아침에 집 근방의 골목길을 걷고 있으면 길 옆 담장 위에 줄장미가 만발하고 있다. 어쩌자고 저렇게 진붉은 빛깔일까?

‘파도야 날 어쩌란 말인가’ 하는 시구가 떠오를 지경이다. 그러다가 한곳에 머물러 서서 방긋방긋 웃고 있는 떨기꽃을 바라본다. 그들이야 무슨 생각이 있으랴마는, 곧장 어루만져 달라는 눈짓으로 보인다. 옛날처럼 죽고 싶다는 감정은 아니지만 오래도록 붙잡혀 있고 싶은 충동이 오는 것은 내가 너무 늙어서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