思考의 거품

                                                                                                정규복

 동양과 서양은 수천년 동안 각자의 문화를 스스로 만들어 나름대로의 문화를 누려오다가 적극적으로 만나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 아마 르네상스 이후 계몽주의 학자들에 의해 동양 문화가 긍정적으로 점철되었다가 그후 서양의 제국주의적 영토의 확장 과정에서 조용했던 동양에 충돌의 물결이 튀기는 가운데 이제 특수한 지역을 제외하고는 거의가 서양의 근대 과학문명을 누리고 있는 현실이다.

우리 나라도 그 궤도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같은 동아시아 문화권에서도 일본이나 중국보다는 가장 뒤늦게 근대 과학문명을 누리기 시작하였지만, 현재는 어느 나라보다도 선택의 여지도 없이 열광적으로 수용하여 외래의 물결은 홍수처럼 범람하고 있다.

이와 같은 서양의 물결이 걷잡을 수 없이 들어올 때, 그에 대한 대응은 이를 적극 막아야 한다는 국수주의와 이를 너그럽게 수용해야 한다는 개방주의가 엇갈렸지만, 동양을 주체로 하여 받아들이자는 소위 온건한 동체서용(東體西用)이 설득력을 가졌던 것도 사실이다.

근래부터는 일찍이 서양에서도 동양 문화를 받아들이는 계몽주의자들이 동양 문화를 예찬한 바 있는 그 힘을 차용하고, 나아가 지금 포스트모더니즘의 물결이 거세게 이는 가운데 서양의 이성주의·과학주의·합리주의의 한계가 노출되자, 동양에 대한 호기심이 그네들에게 일고 있는 틈을 타 우리의 동양 학도들도 서양의 기계화된 물질문명의 부작용에서 벗어나려면 우리 동양 문화뿐이라는 자기 폐쇄적 발언도 간간 일게 되었다. 즉 서양의 부작용으로 노출된 기계주의, 청소년의 마약, 노인의 소외 등 심각한 문제를 일소하는 길은 동양의 정통적 유교 사상을 재기시킬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사실이지 오늘날 우리 사회의 가닥을 잡을 수 없는 혼란은 정치·경제·언론·교육·종교·사법 등 문제가 없는 곳이 없다. 정말로 카오스의 현실이다. 일각에서는 이를 희롱하여 R.O.T.C.(republic of total corruption : 총체부패공화국)라고들 한다. 이런 총체적 어려움에다가 IMF까지 겹치니 아무리 통탄해도 시원치가 않다.

이런 총체적 난국을 가져온 이유는 과연 어디에 있을까? 이를 푸는 해법을 제시하기 전에 전제해 두어야 할 것은 우리의 현실은 동양도 아니요 서양도 아니라는 것이다. 더 보태면 동서양의 나쁜 찌꺼기로 얼룩져 혼재되어 있다. 즉 동양의 폭넓은 인간주의와 서양의 합리성·정직성이 모두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다. 지금 바야흐로 위정자들의 부정·비리가 탄로되는 이 순간에도 그들은 모두가 한결같이 부정(否定) 일변도로 시치미를 떼어 전연 정직성을 찾을래야 찾을 길이 없고, 게다가 정가와 특수 지역은 이기주의, 지역주의로 멍들어 있는 것이 지금의 정치적·사회적 현실이다.

요새 진정한 문민정부가 들어선 이래 정치인·기업인은 말할 것도 없고, 이 사회의 소금이어야 할 교육자·법조인까지도 부정부패가 속출하는 것은 이것들이 지난 군사정권 때는 언론 통제에 의해 깊숙이 가려져 있다가 언로(言路)가 자유화되는 과정에서 각종의 적패가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그 부정 비리의 직접적 책임은 군사정권이 무겁게 짊어져야 할 일이다.

한국의 IMF의 근인(近因)은 물론 이를 막지 못한 당시의 정권에 있다지만 원인은 우리 한국인이 의식적으로 지닌 동양적 후진성에 있다고 여겨진다. IMF의 극복은 행정적 미봉책으로도 어느 정도 극복될 수 있지만 근본적 퇴치는 현재 우리가 안고 있는 동양의 후진적 타성을 어떻게 극복하느냐에 달려 있다. 한국의 그간 기적을 이루었다고 자부하는 경제 성장은 무엇보다도 한국인의 슬기와 부지런함에서 이루어졌지만 문화적·경제적 선진국의 진입은 우리의 가부장적 타성으로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것이다.

한국인은 흔히 동아시아인으로서도 ‘감정적’이라는 말을 자주 듣고 있다. 이를 좋게 받아들이면 정서적이란 말도 되지만, 반성하기 위해서는 ‘비이성적’이란 말과 통한다. 덧붙이면 동양인은 서양인에 비해 정서적인 것이 강하고 이성적이지 못하지만, 한국인은 동양인으로서도 중국인과 일본인에 비해 역시 비이성적이란 것이다.

서양의 고도한 과학 문명은 이성적·과학적·합리적인 데서 이루어졌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대신 동양의 후진적 물질문명은 역시 이성적이기보다는 감정적, 과학적이기보다는 종교적 비합리적인 것에 두어야 함은 백 번 옳은 말이다.

오늘날 한국인의 심성을 보라. 가부장적 틀에 얽매여 정권도 아비에서 자식으로 세습된 것은 피안의 독재로만 매도할 수가 없다. 즉 한국의 기업은 능력 여하를 묻지 않고 자식으로 세습되고 언론도 자식으로, 심지어 대학 총장도 자식으로 세습되는 관행이 오늘날의 엄연한 현실이다. 게다가 학연·지연·혈연으로 얽혀 있는 이 마당에 어떻게 선진화를 기대할 수 있단 말인가? 이런 가부장적 세습과 학연·지연·혈연의 끼리끼리 얽혀 있는 패거리의식의 구도는 정말로 선진화를 가로막는 사고(思考)의 거품이다.

우리는 우수한 동양의 정신 문명 속에서도 이를 자랑할 만한 일이 아니라, 특히 서양의 이성주의·과학주의·합리주의를 한참 배워야 한다. 서양인이 지금 그들의 기나긴 합리주의의 전통에서 허무를 느껴 동양 문명을 기웃하는 것과는 달리 우리는 동양 문명의 껍데기에서 일어나기 위하여는 서양의 합리주의를 오랫동안 배우고 관습화하여야 할 것이다.

이성주의·과학주의·합리주의는 결국 모든 일을 사고함에 있어서 최소한의 비용을 통해 최대의 가치와 성과를 거두자는 차원으로서, 東과 西를 떠나서 누구든 언제나 어디서나 동의할 수 있는 보편주의인 것이다. 되풀이되는 말이지만 서양의 근대화는 이성주의가, 동양의 후진성은 비합리적 감정주의의 소산인 것이다. 이성이야말로 서양의 과학 문명을 꽃피우게 한 조타수라고 감히 말할 수가 있다.

이성과 감성은 항상 어울릴 것이지만 감성의, 이성을 밖으로 한 경우엔 결국 정실주의에 떨어질 수밖에 없다. 우리는 이성주의를 중심으로 思考의 거품인 정실주의·지역주의·이기주의·혈연주의를 극복하는 길만이 선진국으로 들어가는 진입로임을 마음에 새겨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