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 쥐

                                                                                        柳泳國

 가끔 가다 외손녀가 그림을 그려 달라고 조른다. 그림에는 워낙 손방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도 더 난감한 것이 무엇을 그리냐는 소재가 문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곰 같은 괴물을 그려 놓고는 ‘곰쥐’라고 하면 무서워서 더 이상 그림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그런데 요놈이 어금니가 여물기 시작하면서부터는 곰쥐의 위력을 인정하지 않는다. 내 딴에는 제법 익숙한 솜씨로 곰 비슷한 괴물을 그려 놓고 ‘곰쥐’라고 하면, 이 놈은 한술 더 떠서 “거짓말이야. 곰쥐없쩌” 하면서 다른 걸 그려 달라는 것이다. 무시무시했던 곰쥐의 환상을 씻어낸 셈이다.

어떻게 생각하면 미혹(迷惑)의 껍질을 벗어 버렸다는 게 대견스럽기도 하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지 않는 존재는 인정하지 않는다는 그 사고방식이 영악스럽게만 여겨진다.

곰쥐는 저의 할머니가 상상해 낸 괴물이라고 한다. 예전에는 떼쓰고 고집부리는 아이들에게 호랑이나 순사가 특효약이었는데, 요즈음 어린아이들은 그런 말에는 무감각해서 구상해 냈다는 것이 ‘곰쥐’이다. 제 비위에 안 맞는다고 떼를 쓰다가도 “어어, 저기 곰쥐 오네” 하면 덜커덕 그치고는 품에 안겨서 얼굴을 묻곤 했다.

곰쥐! 누가 한 번 불러 본 일도 없고, 용왕이나 도깨비처럼 그림으로 형상화한 것도 아니며, 텔레비전 같은 데에서 본 일도 없는 괴물이다. 하지만 나같은 사람도 ‘곰쥐’라는 말에는 으스스해진다. 쥐처럼 툭 불거진 두 눈알이며, 굴뚝에서 나온 듯한 시커먼 털에다, 곰처럼 몸집이 크고 육중한 걸음걸이로 어슬렁어슬렁 걸어나올 것만 같다.

이 세상에는 인간 이상의 초능력을 가진 자연신들이 있었다. 권선징악(勸善懲惡)의 민담을 남긴 자연물도 있고, 신비와 경외감을 자아내는 상징물도 있었다. 호랑이는 심산유곡(深山幽谷)에서 신선과 함께벗하며 인간 세상을 굽어보고 제물을 받는 산신령이었다. 밤길을 가는데 느닷없이 나타나서 길을 막고 버티고 서 있는 호랑이는 길손을 시험했다고 한다. 담력을 시험하는 게 아니고 죄의 유뮤를 심판하는 산신령이었다.

용은 벽화 속에 존재하는 수신(水神)이었다. 풍운의 조화로 신이 되는 이 용은 뿔이 나고, 몸에는 비늘이 있고, 눈알이 불거지고, 붉은 혀를 낼름거리며 여의주를 물고 있다. 물 속에 있으면 물을 다스리는 용왕이 되고, 지상에서 인간으로 현신하면 임금이 되었다. 임금이 백성과 동격이라면 인간을 다스릴 수 없으며, 물고기와 동격이라면 물을 다스릴 수 없기 때문에 신으로 받들고 복종하는 대가로 보호받자는 뜻이었으리라.

어렸을 때 섣달 그믐밤이라고 기억한다. 어머니는 머리를 감고 세 홰째 우는 닭 울음소리를 기다렸다가 떡시루를 이고는 나에게 등불을 잡혀 앞세우셨다. 두 번, 세 번 거듭되는 일이라서 등불을 든 나는 눈을 비비며 더듬더듬 용왕샘을 향해서 나섰다. 얼부푼 땅이 버석거리고, 귀곡성 같은 바람이 등불을 휘저을 때에는 온몸이 바싹 오그라들었다. 낮에는 단숨에 달려서 닿는 용왕샘이지만 밤길로는 그렇게 멀고도 소름끼치는 길이었다.

당산 솔숲을 지날 때 머리 위에 눈덩이가 떨어지면 주춤했다. 산신령인 호랑이가 시험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잡생각 말고 가자.”

머뭇거릴 때마다 어머니는 걸음을 재촉하시지만, 그 목소리는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눈덩이로 몇 번 정수리를 얻어맞고 당산 마루에 올라서면 반딧불 같은 것이 내려다 보였다. 용왕샘 가에서 동네 아낙들이 치성드리는 촛불 빛이다. 무릎을 꿇고 비손하는 어머니의 등 뒤에서 나는 내력도 모르고 어금니만 부딪치며 꿇어 앉아야 했다.

그러한 용왕샘이 갈꽃만 우북하게 피어 내더니, 몇 년 전 성묘길에 내려다보니 벽돌 공장 드나드는 트럭으로 뭉개졌고, 바로 지난해 추석 성묘길에는 아스팔트에 덮여서 흔적도 없었다. 용궁이 폐허가 된 셈이다.

용왕샘만이 묻힌 것이 아니다. 애기장수 발자국이 있다 해서 장수 바위라고 하던 바위도 묻혀 버렸다. 앞산 솔숲은 나의 생가인 토담집 정원이었다. 솔숲 어구에는 두 그루의 왕소나무가 의연한 도사의 기품으로 서 있고, 그 밑에는 애기장수 발자국이 난 장수바위가 있었다. 바위 밑에서 나온 애기장수가 딛고 올라섰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초승달 빛이 희끄무레할 때면 우리는 멀찌감치 숨어서 애기장수가 타고 온다는 백마의 울음소리에 귀를 기울이곤 했다. 때가 되면 돌아온다는 애기장수를 기다렸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돌아온다 해도 제 발자국을 찾지 못해서 두리번거리다가 그냥 돌아갈 것만 같다.

벗길 것 다 벗기고 보니, 그 속에 가리워 있던 신앙과 꿈이 다 날아가 버렸다. 반들반들 윤이 나는 가마솥 뒷전에 앉아서 가족의 건강을 돌본다는 조왕신도 사라졌다. 조왕신은 찰흙으로 곱게 바른 정결한 부뚜막에 올라앉은 신이었다. 흙바닥일망정 가마솥 뒷전의 부뚜막을 행주로 닦고, 조왕중발에다 첫 새벽 별빛이 담긴 정화수를 받쳐 올리고, 봄철이면 나뭇짐 위에 꽂혔던 연분홍 진달래꽃을 바치면서 가족의 무병 장수를 빌었다. 신령님은 푸짐한 제물보다도 비손하는 사람의 치성을 보고 영험을 베풀기 때문이다. 그러한 수호신을 받드는 조왕중발마저 그냥 두지 못하고 부숴버렸다.

계수나무 아래에서 바둑을 둔다는 옥황상제는 위성을 타고 온 외계인에게 암석덩어리 하나로 그 정체를 드러냈고, 내 정수리에다 눈덩어리를 퍼부으며 시험하던 산신령님은 올가미에 생포되어 동물원 철책 안에서 제물 대신 꼬마들이 던져주는 과자 조각이나 궁싯거리다가 낮잠자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이렇게 되고 보니 이제는 외손녀에게 그려 줄 그림이 없다. 새로운 산신령님, 용왕님, 애기장수를 그려 놓고 이야기해 주고 싶지만, 그런 것을 장난감 백화점에 가서 사자고 조를까 보아 겁이 난다. 날개 달린 천사를 그려 주면 어떨까 생각해 보니, 그랬다가는 그 천사를 잡아서 실로 묶어 달랠지도 모른다. 하다못해 머리 위에 대여섯 개의 뿔이 달린 내 모습을 그려 줄까도 생각해 보지만, 벌써 제 친구가 되어 버린 외할아버지가 잠잘 때 뿔이 돋는다면 믿지도 않을 것이다.

‘하늘이 무섭지 않냐’고 하던 그 하늘은 텅 빈 허공만 아슬해서 늦가을 메마른 바람에 파랗게 얼어 가고 있다. 허공뿐인 하늘이 차갑게 보이기는 제 눈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 놈에게 안겨 줄 주술(呪術) 단지는 없을까? 용왕님, 달님, 산신령님 그리고 애기장수가 함께 들어앉은 단지, 촛불을 켜고 그 앞에 꿇어앉아서 두 손을 모아 기도할 수 있는 그런 단지 말이다.

 

 

 

유영국

수필과 비평으로 등단. 서울경영정보고등학교 국어과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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