앉는 자리

                                                                                               윤모촌

 전철 4호선 종점인 안산 못 미처의 산본역이 내가 타고내리는 정거장이다. 차를 타면 먼저 빈 자리부터 보게 되는게, 이 산본역까지만 왔다가 되돌아가는 것이 있어서 자리잡는 일이 편해서 좋다. 그런데 이런 빈 차를 탈 때마다 보는 일이지만, 사람들의 자리잡는 모습이 자못 흥미롭다. 어떤 사람은 들어서면서 아무데나 바로 앉고, 어떤 사람은 이리저리 둘러보고 앉았던 자리를 다시 옮겨 앉는다. 그 자리가 그 자리인데도 그렇게 하는 것을 보면, 어쨌든 간에 앉은 자리가 마음에 차지 않아서인 듯하다. 이런 일은 나도 그러한 때가 있어, 빈 차에 들어서면 아무데나 앉으면 되는 일인데도 공연히 마음이 쓰이는 때가 있다. 만원 차에서 빈 자리가 나면 가릴 것 없이 앉는 것으로 본다면, 빈 칸에서 자리를 고른다는 것은 참으로 실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렇게 앉는 자리에 마음을 쓰는 것은 아마도 그것이 자신의 처신을 가리고자 하는 선민(選民)의식 같은 것이 아닌가 한다. 하늘로부터 선택된 권리를 부여받았다고 하는 것이 선민의식인데, 이 선민의식이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나는 데에 문제가 있다. 인격적인 것으로 나타날 때에는 다른 사람에게 좋은 영향을 끼치지만, 속물적(俗物的)인 것으로 드러날 때에는 일파만파(一波萬波)의 해악(害惡)을 펼친다. 누구나 자신의 처신에 이런 일이 없기를 바라면서도, 어지간히 현명한 자가 아니고서는 자신은 이것을 분간하지 못한다. 뒤로 가서는 손가락질을 하면서도 앞에서는 추켜세우는 까닭인데, 이래서 앉는 자리에 눈이 어두워지고 판단이 흐려진다.

나도 예외가 아니어서 지면에 이름이 오르내리는 일에 급급했고, 나와는 관련이 없는 자리인데도 기웃거리곤 하였다. 가령 책을 엮은 사람의 머리글 속에서나, 당선소감을 쓴 사람의 글 속에 내 이름을 거명(擧名)하며 감사 운운한 것을 보고 자랑스럽게 여기기도 하였다. 거명된 그것이 조소(嘲笑)거리가 되는 줄도 모르고 득의양양(得意揚揚)하면서, 떠받들린 자나 떠받든 사람이 다같이 욕이 되는 줄을 몰랐다. 그리고 아는 체하면서 얼굴을 들고 다녔다. 참으로 실소(失笑)를 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얼마 전 미지(未知)의 사람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내게 앉을 자리 하나를 내준다면서, 창간하는 문예지 수필 부문의 고문으로 앉힐 터이니 승낙을 하라는 것이었다. 얼떨결에 승낙을 했지만 해놓고 생각을 해보니, 그 자리가 내가 끼어들 자리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만원 전철 속 빈 자리에, 전후 사정 가리지 않고 넙죽 앉은 꼴이다. 물론 전철 속의 그런 자리라면야 누가 뭐랄까마는 내가 승낙을 한 경우는 그런 것이 아니다. 사양을 해야겠는데 잡지가 나오지 않고 연락처도 알아두지 않아서 답답할 뿐이다. 그냥 앉으면 어때서… 또는 주지 않아서 못 앉지… 하는 이가 있을 터이지만, 평양 감사도 저 싫으면 그만이다.

사람이나 동물이나 살아가는 자리는 같은 종류끼리라야 통하고, 사기꾼은 사기꾼끼리라야 어울린다. 그런데 이 끼리끼리의 법칙이 지금은 체면도 없이 무너져 서로의 영역을 넘나든다. 자신의 체면쯤을 내세울만 한데도 청탁(淸濁)을 가리지 않고 남의 등에 업히기를 꺼리지 않는다. 이래서 천박한 개념의 말로도 쓰이는 유유상종(類類相從)이라는 말을 하게 되는가 보다.

유유상종의 말이 나왔으니, 유유상종을 하지 않은 이야기 하나가 있다. 조선 왕조 때 문장가이자 명신(名臣)인 월사(月沙)의 부인 권씨는 귀부인 사회에서 유유상종을 하지 않았다. 정명공주(貞明公主) 집에 혼사가 있어 화려한 패물과 의상으로 성장(盛裝)한 귀부인들이 모여들었다. 그런 중에 갈포(葛布) 차림의 권씨 부인이 검소한 모습으로 뒤늦게 참석하였다. 이때 좌중의 귀부인들이 빈축을 하면서, 이 자리가 어떤 자리인데 저런 차림으로 감히… 하고 비웃었다.

잠시 뒤 잔칫상을 물리고 자리를 뜬 권씨 부인이 만류하는 공주에게 말하였다. 집의 대감이 새벽같이 출근을 했고, 이조판서인 큰아들이 돌아올 시간이며, 승지인 작은아들이 당직이어서 어서 돌아가 저녁을 지어야 한다며 일어섰다. 권씨 부인이 자리를 뜬 이유는 말한 바대로 일 터이지만, 어쩌면 부인은 귀부인들의 그 자리가 자신의 자리가 아니였는지도 모른다.

흔히 앉는 자리의 권위를 세워야 한다는 말을 한다. 하지만 남이 어찌 권위를 세울 수가 있는 것인가. 그것은 먼저 자신의 자리가 잘못 앉은 것은 아닌가부터 알아야 하는 데 있다. 하지만 나부터가 그렇게 하는 것이 쉽지 않으니 그것이 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