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절에 관하여

                                                                                                              정명환

 낯설은 곳을 돌아다닐 때 친절한 사람들을 만나지 못한다면 서글프고 겁날 뿐 아니라 그 여행이 저주스럽게 느껴지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에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가령 길을 가리켜 달라면 퉁명스럽게 “난 모르니 다른 사람에게 물으시오”라던가 혹은 “저쪽이오” 하고 턱을 내밀어 보이기만 하는 거친 친절로부터, 꼼꼼하게 지도를 그려 보이거나 제 발로 안내해 주는 자상한 친철에 이르기까지, 그 표현과 정도는 천차만별이지만, 아무튼 간에 타자(他者)의 선의에 완전히 절망하는 일은 거의 없다. 나 역시 여러 곳을 여행할 수 있었던 것은 그런 남들의 무수한 친절 덕분이다. 한데 그 중에서도 지금껏 기억에 남는 것이 두 가지 있다. 더구나 종류가 다른 그 두 가지 친절을 하루 사이에 체험한 것이다.

이십여 년 전의 일이다. 나는 파리에 몇 달 머물러 있었는데, 마침 사업을 하는 L군이 와서 이 기회에 런던을 며칠 동안 가보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나는 그 자리에서 동의를 하고 우리는 당장 이튿날 떠났다. 한 시간 남짓한 비행기 여행이었지만 히드로 공항에 도착했을 때는 벌써 오후 한 시가 지나서 시장했다. 그럴 때 가장 만만한 것은 구미로 보나 호주머니 사정으로 보나 중국 음식점인데, 우리가 나온 출구 부근에는 그럴싸한 곳이 눈에 띄질 않았다. 그래서 마침 근처를 지나가던 한 서양인에게 물었다.

“이 근처에 조촐한 중국 식당이 없을까요?”

그는 한참 생각에 잠긴 듯 말이 없더니 자기를 따라오라고 했다. 어딘지 모르지만 한참 걸어서 후미진 곳으로 갔다. 그가 우리를 강탈할지도 모른다는 본능적인 경각심은 그의 좋은 인상 때문에 전혀 생기지 않았고, 다만 이 부근이라면 싸구려 중국집이 있으리라는 짐작이 갔을 뿐이다. 그러나 우리의 예측은 완전히 빗나가고 말았다. 그는 그곳에 서 있던 자신의 자동차 문을 열더니 타라고 했다. 그리고는 말했다.

“이 부근에는 마땅한 중국집이 없습니다. 내가 잘 가는 비싸지 않으면서도 맛있는 곳이 시내에 있는데, 당신들이 묵을 호텔에서 별로 멀지도 않으니 거기로 안내하죠.”

우리는 족히 한 시간 가까이 달렸다. 하도 미안해서 나보다 영어를 잘하는 L군이 물었다.

“우리 때문에 선생은 엄청나게 우회(迂回)를 하시는 게 아닙니까?”

그러자 즉석에서 대답이 나왔다.

“좀 돌아가면 어떻습니까? 나는 나 자신이 생면부지의 외국에 갔을 때 누가 나를 이처럼 친절하게 대해 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두 분을 이렇게 모시고 가는 겁니다.”

우리는 그 당장에는 고맙다는 말만을 연발하고 그가 문전에 세워준 식당으로 들어갔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지만 반성적 기능도 역시 배가 차야 제대로 발휘되는 모양이다. 나는 식당에서 나오면서 그 친절한 서양인이 한 마지막 말을 되씹어 보았다. 그러자 그의 친절은 순수한 동기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그 밑에는 매우 공리적인 계산이 깔려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선(善)을 오직 그 자체를 위해서 하라는 절대적 명령에 어긋날 뿐 아니라 선을 행했을 때의 그지없는 기쁨 자체를 겨냥한 것도 아닌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다음과 같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남들도 내게 친절을 베풀어 주기를 바라는 타산(打算)에서 나온 친절, 말하자면 이기적인 역지사지(易地思之)가 나쁠 것이 무엇이 있으며, 오히려 그런 공리적 생각이야말로 현실적으로는 인간의 정분을 유지해 온 것이 아니겠는가? 그뿐 아니라 “오는 정이 있어야 가는 정이 있다”는 우리의 속담과 견주어 볼 때 그 서양인의 타산이 더 도덕적인 것이 아니겠는가? 왜냐하면 우리의 속담은 ‘받기부터 해야 주겠다’는 것이지만, 그의 윤리는 ‘주고나서 받기를 기대한다’는 더 너그러운 계산에 의거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나는 런던에 도착한 즉시 과연 지혜로운 경험주의와 실리주의의 나라에 왔구나 하는 것을 실감하게 된 것이다.

나와 L군은 호텔에 짐을 풀고는 그런 반성을 씨앗삼아 이 이야기 저 이야기를 나누다가 저녁을 먹고는 거리로 나섰다. 지금 기억으로는 피커딜리 서커스의 야경을 보려고 했던 것 같다. 동서남북조차 잘 분간할 수 없는 밤거리이니 이 사람 저 사람에게 길을 묻기를 되풀이한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그러나 런던의 이른바 커크니가 이해하기 쉬운 것이 아니어서 영어에 능통하다는 L군 역시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고는 엉뚱한 곳으로 나를 끌고 다녔다. 그래서 아예 그만두고 호텔로 돌아가려고 하다가 마지막으로 한 노신사에게 최후의 희망을 걸고 다시 안내를 청했다. 다행히도 그는 나도 알아들을 수 있는 기막힌 표준 영어로 길을 가리켜 주었다. 우리는 그가 말해 준 경로를 따라 이 골목 저 골목울 누비고 갔는데 어느 순간 뒤를 돌아다 보니 그가 멀리서 따라 오고 있었다. 우리는 놀라서 그가 다가오기를 기다리고는 당신 역시 같은 방향으로 가느냐 물었다.

“아닙니다. 다만 두 분이 혹시 다른 길로 잘못 접어들까 보아 불안해서 따라와 본 겁니다. 이제 당신들은 저 십자로를 건너서 똑바로 가기만 하면 되니 안심하고 돌아가렵니다.” 우리는 그가 어둠 속으로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들었는데, 내 평생에 그렇게 정성껏 손을 흔든 일은 아마도 없었을 것이다.

나는 호텔에 돌아와서 우리를 먼 발치에서 따라오던 그의 속마음을 이렇게 풀이해 보았다. ‘만일 내가 앞장 서서 안내하면 저 사람들은 나의 친절에 큰 부담을 느끼고, 또 나는 내가 친절한 사람이라는 것을 과시(誇示)하는 겸손치 못한 꼴이 되리라. 그것은 오른손이 하는 짓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성서의 계율(戒律)에 어긋나는 일이기도 하다. 게다가 과도한 친절은 앞으로 그들이 런던의 길을 스스로 찾아다니는 자신(自信)과 기쁨을 잃게 해줄지도 모른다.’

이것이 과연 그 노신사의 속마음이었는지 혹은 나의 지나친 억측이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아무튼 그의 행위가 보기 드문 고귀한 친절이었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그러나 나는 우리를 중국 식당에 데려다준 사람의 타산적 친절이 이 노신사의 더 깊고 덕스러운 배려보다 윤리적으로 낮은 수준의 것임을 드러내기 위해서 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자기 중심적이고 많은 경우에 약삭빠른 우리 모두의 인간성에 비추어 볼 때, 도리어 전자(前者)와 같은 이기적 동기의 친절이 널리 퍼지기를 바라는 것이 더 현실적이라고 생각한다. 성인(聖人)이나 덕인(德人)을 흉내내는 위선자들보다는 약하고 간사한 것이 자신의 본체임을 인식하고 반성하면서 스스로 바람직한 대타관계(對他關係)를 맺어나가려고 애쓰는 사람들의 존재야말로 이 땅의 소금이리라. 그런 점에서라도 ‘오는 정이 있어야 가는 정이 있다’는 우리의 소박하고 노골적인 이기주의는 ‘가는 정이 있어야 오는 정이 있다’는 더 세련되고 더 염치 있는 이기주의로 전환되었으면 하는 생각이 새삼스럽게 드는 것이다.

 

 

정명환

서울대학교 및 가톨릭대학교 불문과 교수 역임.

저서로 『한국 작가와 지성』, 『졸라의 자연주의』, 『문학을 찾아서』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