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어디서 무엇을 하나

                                                                                                    강호형

 까닭없이 외로울 때 해 보는 생각이 있다.

‘누가 어디서 무엇을 하나?’

요즈음 첨단 정보시대라 리모컨 하나로 지구촌 구석구석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누워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외로움이 가시지 않는다. 외로움이 가시기는커녕 그 엄청나고 신기하고 때로는 가슴아픈 사건들 앞에 국외자로 따돌려진 것만 같아 더 외로워지기 십상이다. 게다가 매스컴이 전하는 뉴스는 지극히 부분적인 것에 불과하고 정작 나를 따돌리는 일들은 따로 벌어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을 떨쳐 버릴 수가 없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그럴 만도 하다. 나를 늙게 하고 병들게 하고 그리하여 마침내는 이 세상에서 퇴출당하게 할 일들이 매스컴에 보도될 리 없다. 그렇다고 그런 일들이 벌어지지 않는다고 믿을 수도 없다. 나는 나날이 늙어가고 있고, 언젠가는 병들어 죽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매스컴이 전하는 뉴스는 실황을 중계하는 것이 아니라 대개가 이미 벌어진 결과에 불과하니 지난 일은 그렇다 하더라도 지금, 혹은 잠시 후에 나를 따돌리려는 흉계가 꾸며지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이것이 전혀 근거 없는 망상은 아닐지도 모른다. 지구촌 곳곳에서 자행되고 있는 환경 파괴 행위가 나를 죽일 수 있고, 살인 강도범의 비수가 언제 내 목을 겨눌지 알 수 없으며, 특권층의 부정부패가 어떤 형태로 나를 고사시킬지도 알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따위 공상은 공상도 못 되는 청승쯤으로 돌리는 것이 좋겠다. 늙고 병들어 죽는 일이야 염라대왕이나 저승사자의 소관이니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숙명이요, 환경 문제라면 내가 실천하는 수밖에 없을 것이며, 살인 강도가 돈도 없는 내 목에 비수를 겨눌 리 만무할 뿐 아니라 특권층이 부패했다고 나만 굶어 죽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좋은 쪽으로 상상의 날개를 펼쳐보기로 한다.

‘누가 어디서 나를 위하여 무슨 일을 하고 있나?’

진작에 그럴 일이었다. 대부분의 세상 사람들이 다 나를 위해 무엇인가를 하고 있을 것이란 확신이 서는 것이다. 이런 생각을 누가 망상이나 공상, 하물며 청승이라고 매도하랴. 건전한 민주 시민이 하는 일이라면 나를 위하지 않는 일이 없다. 지구촌 사람들 모두가 그렇다.

보시라. 나는 지금 미국제 만년필로 노르웨이 아니면 캐나다 산일지도 모르는 종이 위에 이 글을 쓰면서 국산 담배에 중국제 라이터로 불을 붙여 피우고 있다. 뿐만 아니라 소주 공장에서는 주류파(酒類派)의 핵심 멤버인 나를 위해 ‘참이슬’을 빚고 있을 것이다. 나의 단골 술집 ‘종묘 보신탕’에서는 가마솥에 불을 지폈을 것이다. 더구나 오늘은 중복이니까 특별 서비스를 준비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얼마나 신나는 일인가? 이런 일은 너무 많아 일일이 열거할 수도 없다. 그렇다면 마냥 신명만 낼 일은 아니다.

‘나는 지금 누구를 위하여 무엇을 하고 있나?’

난감하구나! 하기야 나는 지금 이 글을 쓰고 있고, 글을 쓰는 일이 남을 위한 일이 될 수도 있기는 하다. 그러나 글도 글 나름이다. 온갖 혜택을 다 누리면서 이것도 일이랍시고 진땀을 흘리고 있는 이 몰골.

염치는 없지만 할 수 없는 일이다. 당장 할 수 있는 일이 이것뿐이니 우선은 이 짓이라도 열심히 하는 수밖에. ‘외롭구나!’ 따위의 쓸데없는 피해 망상에 빠지는 것보다야 얼마나 근사한 일이냐. 이걸 읽고 뭔가를 느끼는 사람이 아주 없으란 법도 없다.

누가 어디서 내 말을 하나 / 누가 어디서 내 말을 하여

어느 소가 알아듣고 전해 보냈다.  ─ 未堂 왏盈ㅁ? 중에서

 

안테나가 이쯤 되고 보면 개 짖는 소리에도 전해 오는 바가 있을 것 아닌가.

지난 토요일(1999. 7. 24)은 수필문우회에서 야유회를 갔었다. 참석 인원은 20명이었지만, 정원 45명의 성능 좋은 관광버스도 더위를 먹었을 것이다. 몸무게로만 따지자면 정원을 두 배쯤 초과해도 무방할 분들이지만 그 명성의 무게가 대단했기에 하는 말이다. 수필계에서 뿐만 아니라 학계에서도 단연 국가대표급의 거목들만 열아홉 분, 이만한 몸통에 깃털(불초 소생) 하나까지 더 얹었으니 그 무게를 감당하기가 벅찼을 것이다.

이포 나루터에서 멧돼지 바비큐에 막국수, 거기에 소주가 몇 순배. 목아박물관에서 불교 문화재들을 보고 남한강 유역의 풍광에 젖어 돌아왔다. 나는 그 말석에 앉아 생각해낸 말이 있다.

“아마존의 정글에서 나비 한 마리가 날개를 파닥이면 수주일 혹은 수개월 후에 시카고의 날씨를 변화시킬 수 있다.”

이른바 ‘나비 효과’라는 것이다.

‘누가 어디서 무엇을 하나.’

수필문우회가 남한강변에서 야유회를 했다. 당대의 거목들이 이만한 액션을 취했다면 결코 간과할 일이 아니다. 그런데 사흘이 지난 오늘까지 매스컴에 한 줄 보도가 없는 것을 보니 이날 문화부 기자들은 직무 태만이었다.

제주도에 태풍이 상륙했다는 소식이다. 안데스 산록에서 독수리가 날개짓이라도 한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