蘭香도 못 맡으면서

                                                                                                   이정호

 봄부터 여름 내내 이런저런 야생꽃이 연이어 피고 있다. 작은 뜰에 몇 년 전부터 아내가 여기저기에서 얻어다 심어놓은 것들이다. 전에도 화분에 화초를 많이 키웠었는데 겨울이면 큰 애물단지였다. 그래서 밖에서 겨울을 그냥 지낼 수 있는 야생 것들로 바꾼 것이다. 야생은 야생대로 까다로운 면이 없는 것도 아니지만 야생이니 만큼 크게 사람 손길을 바라지 않는다. 한여름인 요즈음, 저녁 한때를 이들 야생꽃 곁에서 한가롭게 여유를 부리는 재미가 참 괜찮다.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서커스 주인이 받는다고, 꽃가꾸기는 아내가 하고 그 즐기기는 내가 하고 있는 격이다.

곁에서 보아도 이만저만 손이 가는 게 아니다. 새벽 5시면 벌써 아내는 이 애들을 손보느라고 법석이다. 알음알음으로 사람들이 많이 찾아오곤 하는 걸 보고 꽤 잘 가꾸고 있구나 했다. 그런데 가끔 온 사람 중에는 꽃을 달라고 하는 이가 있다. 그런 사람일수록 꽃 가꾼 경험이 없는 사람이다. 언뜻 보아서 탐이 나 가져가고 싶은 것인데, 실제로 가꾸어 본 사람이면 그렇게 성큼 달라고 하지 못할 것이다. 꽃도 자식 키우는 것 같아서 여간 공을 들이고 잦은 손길이 가야 하는 게 아니다.

작년 이맘때 패랭이가 꽃을 피워 그 향기에 반했었다. 올해는 포기가 성하게 뻗어서 향이 작년에 비할 바가 아니다. 어제는 저녁 나절 그 패랭이꽃 화분을 야외용 의자 옆에 갖다놓고 냄새를 맡으며 어둑어둑 저무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콧속 깊이 은은히 흘러드는 냄새가 머릿속 가득 채우는 느낌이다. 이런 나를 보고 아내는 “그냥 그 자리에 두어도 향기가 뜰에 가득한데 당신은 참 유별을 떨어요” 하며 핀잔이다.

그러고 보면 내 코가 잘못된 게 틀림없다. 집안 마루 창가에 놓인 난에서 꽃이 피어도 눈으로 볼 뿐 냄새를 못 맡는다. 아내는 멀리서도 그 향을 얼마든지 맡을 수 있다는 것이다. 아내는 난이 꽃필 때마다 온 집안에 향이 가득한데 어째서 이 좋은 냄새를 못 맡느냐며 안타까워하고 있다. 마음이 맑지 못해서 그런가 보다고 하는 아내의 말에 그럴 리가 있냐고 반박하곤 하지만 속으로는 참으로 안타깝다. 멀쩡한 코로 그 맑고 그윽한 난의 향기를 맡을 수 없다니.

생각해 보니 아내와 내 코의 구조에 차이가 있어서가 아니라 공해에 찌들은 탓이 아닐까 한다. 서울 한복판에서 공해에 절어버린 내 콧속의 냄새 맡는 세포가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스님들이 냄새 감각이 뛰어나다는 것도 일리가 있다. 코만 아니라 혀도 그렇다. 산사에서 사찰 음식을 먹고 마시는 녹차 한 잔의 향과 맛은 도시에서 아무리 그 기분을 내려 해도 안 된다. 채식으로 담박하게 씻긴 혀와 술과 고기로 길들여진 혀와 예민한 차의 맛을 느끼는 정도가 같을 리가 없다.

산다는 게 뭘까. 생물로서의 삶과 인간으로서의 삶으로 나누어 그 의미를 따질 수 있을 것이다. 전자는 유물론적 행복론을, 후자는 정신적인 행복론을 내세울 테지만, 그러나 그 구분이 모호할 때가 적지 않다. 배가 쫄쫄 고픈 사람에게 심오한 철학을 말해 봐야 귀에 들릴 리가 없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란 우리 속담이 있는 걸 봐서도 인간이 아무리 고원한 정신의 소유자라 해도 육체를 지닌 생물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코와 눈과 귀 그리고 피부를 통해서 느껴지는 감각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하는 정도의 차이와 그것들을 어떻게 표현하느냐에 따라서 정신적으로 보일 수도 있고 육체적(감각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감각기관의 기능이 그 사람의 품위에까지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이야기다.

그렇다고 아내가 나보다 고원한 예술적 소양을 지니고 있다는 말은 아니다. 난향을 맡고 못 맡고에 따라서 예술적이냐 아니냐 극단적으로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난꽃 앞에서 만큼은 아내가 나보다 더 행복한 것만은 사실이다. 아니 가람 이병기 선생이 난을 그토록 사랑해서 난이 꽃필 때면 친한 벗을 초청해 술을 접대하며 즐거워했다는 사실에서, 나는 그야말로 격높은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불행한 인간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어디 가람 선생뿐인가. 고래(古來)로 난을 정신적 벗으로 곁에 두고 사랑했던 시인 묵객들이 얼마이던가. 아내가 난이 꽃대를 내민다고 반가워 나를 이끌어 보여줄 때는 겉으로 내색을 하지 않지만 속으로 다시 또 한 번 무능한 내 코를 원망하곤 한다.

천생 난향을 맡지 못하는 것이 코의 구조가 남달라서는 아닐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다른 냄새도 맡지 못해야 하는데 그건 아니고 보면 냄새 감각세포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렇다면 나란 인간은 품격 있는 냄새는 맡지 못하고 얕은 냄새만 맡는 속물인가. 내 정신적 차원의 문제인가. 사실 나는 난향을 못 맡는 데 대해서 퍽이나 속상하고 부끄럽기까지 하다. 남에게 내놓고 말하지 못할 만큼 내 자존심에 관한 문제이기도 하다. 누군가가 내게 어떻게 난향도 모르면서 글을 쓰고 동양화 한답시고 먹을 가느냐고 하면 내심 양심의 얼굴이 붉어질 것이다. 베토벤이 귀가 멀어 듣지 못하는 걸 숨기다가 탄로가 났을 때 죽고 싶도록 비관했었다는데, 이해가 간다. “귀머거리가 무슨 음악을 한다고” 하는 조소의 소리가 음악가의 가슴을 예리하게 저몄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어울림이 얼마든지 있다고 생각한다. 술잔을 입가에 대지 못하는 사람도 술의 낭만을 이해하는 사람이 있듯이, 실생활은 철저히 현실적인 사람 가운데에도 풍류의 꿈을 잃지 않고 사는 사람이 있다. 술은 이태백, 낚시는 강태공이나 정신은 지극히 속되고 자잘한 사람도 얼마든지 있다. 술을 퍼마시면 뭣하나. 술의 진정한 맛을 모르고 술을 이기지 못한다면 술을 마시지 못하면서도 그 멋과 기분을 이해하고 느낄 수 있는 사람만 못한 것이다. 물고기가 아니면서 물고기의 기분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인생의 스승으로 존경받을 만한 사람이다. 그래, 난향을 맡지 못한다고 비관할 일이 아니다. 난향을 가슴으로 맡을 수 있으면 된다. 누가 난향을 말하면 그와 더불어 얼마든지 이야기할 수 있다. 이렇게 나 자신을 다독거려 본다. 그러나 아무리 이렇게 자위해도 소용이 없다. 내 마음 저 밑바닥에 깔려 있는 의식의 경계는 나 자신도 속일 수 없는 것인가.

오늘 아침 또 난 꽃대 하나가 뾰족이 돋아 오르는 걸 아내가 먼저 발견하고 내게 소리쳤다. “여기 좀 봐요. 꽃대가 또 올라와요.” 순간 내 가슴은 심한 모멸감으로 심장 박동이 멈추는 걸 느꼈다. ‘그게 뭐 그리 대단해, 지금이 어느 때인데. 직장 잃고 사느냐 죽느냐 야단들인데, 그까짓 꽃대를 가지고 호들갑이야.’ 마침 출근하던 차여서 다행이었지 하마터면 이렇게 버럭 소리를 지를 뻔했다. 나는 어쩔 수 없는가 보다. 코만 문제가 있는 게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