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전에 얼굴이라도

                                                                                                朴在植

 ‘어언 고희를 넘어서니 친구들이 하나둘 타계해 가고, 와병중의 친구도 늘어나네요. 생전에 얼굴이라도 보기 위해 금년 동창회를 다음과 같이 개최하니 꼭 참석해 주기 바라오.’

매년 이맘때면 고향인 진주에서 갖는 초등학교 동기 모임을 알려온 사연의 허두가 비창하다. 고향에서 붙박이로 살면서 총무 일을 맡아보는 정군이 자필로 써서 띄운 엽서이다. 자필의 우편 통지문을 받기는 처음인 것 같다. 모임이 시작된 처음 한동안은 등사한 우편물이 왔다. 내용도 노상 사무적이었고 으레 ‘만화 방초 한창인 계절을 맞아 옛 우정을 더욱 돈독히 하기 위해’ 하는 투의 문구가 서두를 장식했다. 그러다가 해가 갈수록 인원이 줄어들자 근년에 와서는 사발 통문식의 전화가 그것을 대신해 왔는데, 자필의 엽서로 기별을 접하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어쩌면 불참할 확률을 가늠하여 나에게만 띄운 엽서일지도 모른다. 짜장 따지고 보면 참석보다는 빠지는 횟수가 많은 것이 나의 내력이었고, 지난 모임에는 두 번을 거푸 불참한 전과가 있는 터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내가 이 ‘불알 친구’들과의 만남을 결코 소홀하게 여긴 것은 아니다. 여느 동창 모임에서는 느낄 수 없는 수더분한 분위기에 젖어 흉허물없이 어울렸다가 돌아올 때면 늘 ‘다음 모임에도 꼭 와야지’ 하고 속으로 다짐하기가 일쑤인 유달리 정이 가는 만남인 것이다. 그런데도 그 다짐이 번번이 측간 길의 작심 꼴이 되곤 하는 것은 오로지 멀리 떠나 있는 자의 해태한 타성 탓이라고 할 수밖에 없겠다.

그래서 이번 모임에는 만사 제폐, 불원천리의 성의를 추슬러 참가하였다. 반드시 그것이라고 명토를 박을 수는 없었지만 ‘생전에 얼굴이라도 보기 위해’라는 엽서 속의 대문이 적이 호소력을 작용했던 것 같다.

3년 전 미금에 사는 맏형이 한동안 적조했던 나에게 ‘얼굴이라도 보자’고 전화가 온 것을 서울에 올라가는 기회에 들리리라 미루다가 얼마 안 있어 사별한 것이 지금껏 못내 후회가 되는 터이다.

모임에 나온 ‘생전의 얼굴’은 고작 10명이었다. 내가 참석했던 3년 전에 비하면 많이 줄어든 숫자이다. 그새 세 사람이 유명을 달리했고, 나오지 않은 친구들은 대다수가 병고로 기동이 불편하거나 객지에서 올 형편이 못되어 빠졌다고 하며, 개중에는 연락할 주소가 가뭇없이 된 친구도 있다는 총무의 설명이다. 그나마 졸업 때 77명의 동기생 중 이승에 남아 있는 친구는 고작 스무 명이 채 못된다고 새삼스럽게 손가락을 꼽아 보이는 그의 표정이 한결 처연하다. ‘생전에 얼굴이라도……’ 하고 써 보낸 글발이 한갓 수사가 아닌 그의 충정으로 마음에 와닿는다. 6·25가 장정의 적령기였으니 생노병사의 조화를 두고도 평균 수명이 남다르게 짧은 것이 우리 동기의 명운이기도 하다.

그런데 하군이 두 달 전에 작고했다는 소식은 나의 심사에 잔잔한 충격파를 자아냈다.

몸놀림이 날렵하여 ‘쥐새끼’라는 별명이 붙은 하군은 능사의 싸움질과 해찰궂은 품행으로 호랑이 담임선생조차 손사래를 치는 학급 안의 작은 왕초였다. 수업중 선생님의 지명을 받고 일어선 짝의 걸상을 슬그머니 옆으로 밀어내어 와당탕 엉덩방아를 찧게 만드는 장난을 서슴없이 해냈다. 소행이 이러하니 교단으로 불려 나가 벌을 서거나 종아리채 맞기를 좌수 볼기 치듯 했지만, 그럴 때마다 다른 아이들처럼 눈물을 흘리거나 잘못했다고 용서를 비는 법이 결코 없는 악바리 고집통이이기도 했다.

그런 그가 하루는 영화 구경을 시켜주마고 나를 극장으로 데리고 갔다. 상영중인 프로는 그 무렵 우리들의 인기를 독차지하던 ‘다루마치’라는 쾌한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시리즈 영화의 한 편으로 기억된다. 그렇잖아도 이 영화가 보고 싶어 좀이 쑤시던 참이라 얼씨구나 하고 따라 나설 수밖에. 그런데 그가 이끈 곳은 엉뚱하게도 극장 뒤 높다란 담장에 붙어 있는 쪽문 앞이었다. 어쩌자는 건가 하고 어리둥절한 나를 세워둔 채, 그는 담벼락과 나란히 서 있는 전신주 사이에 양쪽 팔다리를 버텨 짚고는 잽싸게 추어 오르는 것이 아닌가. 숫제 영화의 주인공 다루마치의 동작을 방불케 했다. 이윽고 안쪽에서 잠긴 철문이 열리면서 빨리 들어오라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무척 발씨 익은 길눈으로 요리조리 허술한 구멍을 찾아 무대 뒤를 돌아서 마침내 관람석에 당도할 수 있었다. 난생 처음 도둑 구경을 하게 되는 불안감에 어찌할 바를 모르는 나를 자리에 앉히고 그는 뒷좌석에 가서 태연스레 앉았다. 과연 ‘쥐새끼’로구나 하고 내심 감탄하고 있는데, 이게 웬일인가! 얼마 안 있어서 극장의 기도(문지기)가 나타나더니 “이 자식 또 왔구나” 하고는 두말 않고 그의 덜미를 낚아 끌고 나가는 것이 아닌가. ‘장개’로 악명이 높은 기도에게 붙들려 나갔으니 필시 경을 칠 것이고, 그의 실토로 미구에 나도 붙들릴 것이라는 생각에 간이 콩알만큼 작아져서 안절부절 못한 것은 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영화가 끝날 때까지 그런 일은 없었다. 나중에 가서 닿은 짐작이지만 그가 우정 나와 떨어져서 자리를 잡은 것은 미리 그런 사태를 예측하고 한 배려였던 것이다. 이튿날 그 뒤의 전말을 궁금해 하는 나에게 그는 “응, 나는 장개를 잘 알아” 하고는 시치미를 뗐다.

졸업을 하자 얼마 후에 그는 무슨 연고에서인지 만주(滿洲)로 훌쩍 떠났고, 해방 후는 고향에 돌아와 한동안 하는 일없이 머물다가 다시 역마살이 돋혀 서울과 부산 등지로 떠돌면서 아편 중독자가 되어 타락한 생활을 하고 있다는 소문이 풍편에 들려오기도 했다. 그런 그가 어느 날 홀연히 내 앞에 모습을 나타냈다가 바람처럼 사라진 것은 30년 전쯤 내가 부산의 모 경찰서장으로 있을 때이다. 정문 현관 쪽에서 떠들썩한 소리가 나기에 무슨 일인가 하고 비서를 내려 보냈더니, 어떤 광인 비숫한 사람이 서장을 만나겠다고 입초 순경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다는 것이다. 민원을 직소하기 위해 찾아온 사람인가 하여 계단을 내려가다 보니 뜻밖의 하군이었다. 허름한 노타이와 반바지 차림으로 맨발에 슬리퍼를 신고 있는 행색이 가히 광인으로 오인될 만한 몰골이었다.

“어, 하군 아닌가! 입초 들여 보냇!”

나도 모르게 목소리에 톤을 높였는데, 그는 나를 한번 힐끗 올려다 보며 손을 번쩍 들어 보이고는 “인제 알았지!” 하고 입초의 어깨를 툭 치고는 그냥 뒤돌아서 문 밖으로 나가 버렸다. 이내 뒤쫓았으나 그는 벌써 오가는 자동차 틈새를 쥐새끼처럼 누비고 한길을 건너 뒤도 돌아보지 않고 행인들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그가 남루한 몸을 이끌고 탕자처럼 고향에 돌아와 가정에 정착한 것은 갑년을 앞둔 무렵이었다고 한다. 다행이도 그새 튼실하게 장성한 아들의 가업을 거들면서 지내는 터수도 무던했다고 한다. 그런데 전과 같지 않게 위인이 아주 변했다는 것이다. 신병을 이유로 술과 담배를 끊고 자린고비가 되어 회비가 아까워서 모임에도 참석하는 일이 없다는 것이 친구들의 입초시에 오르는 그에 대한 평판이었다. 그러자니 고향에 있는 친구들과도 노상 몰교섭한 상태로 지낸 셈이다. 돌아온 그는 옛날의 고향으로 돌아온 것이 아니라 자기 나름의 고독한 세계를 갈무리하기 위해 노후의 보금자리를 찾은 정신적인 나그네였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것이 남달리 자존심이 강했던 하군다운 생애같기도 했다.

“죽었을 때 왜 기별을 좀 안 했나?” 나무람 조로 묻는 말에 총무인 정군은 “여기 있는 친구끼리만 가봤지. 뭐 누가 먼저 죽고 뒤에 죽느냐 차이뿐인데 우리 나이에 죽는 것이 대순가. 이렇게 살아 있는 동안 한 번이라도 더 보는 것이 소중한 일이지” 했다. 딴은 웬만한 부음은 후문으로 접하는 것이 요즘의 나의 주변사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