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국이 피기까지

                                                                                            변진숙

 산국이 눈에 띄기 시작한 것은 가을이 이울어져가는 때였다. 봄내, 여름내 꽃나무들을 매만져 주느라 화단 구석구석에 나의 눈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는데, 어느 날 보니 울타리 밑에 한무더기의 국화가 가지를 무겁게 늘어뜨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대하니 기별도 없이 찾아온 친구처럼 반갑기도 하고 놀라웠다. 산국은 찬 이슬이 내리는 한로를 대엿새나 넘기고도 수낱알만한 꽃망울을 터뜨릴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벌써부터 아침 저녁으로 찬바람이 옷깃을 파고들어 머지않아 무서리가 내릴 것을 생각하니 한걱정이 되었다. 조금은 울적한 기분으로 뜰에 나섰던 나는 기나긴 침묵을 지키고 있는 국화 앞에서 한동안 움직일 수 없었다. 그 말 없는 기다림은 내게 여유와 기도의 자세를 일깨워주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내 곁에서 늘 손을 잡아 이끌어주던 친구도 그랬다. 여럿이 모여 있는 자리에서 그는 항상 있는 듯 없는 듯했다. 자기의 의견을 내세우고 발표하는 자리에서는 서로 목소리를 높이다 보면 다소 분위기가 고조되어 나중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게 되는 경우가 있다. 그런 왁자함 속에서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조용히 듣고 있는 친구가 내 눈에 띄었다. 처음부터 그에게 관심을 가졌던 것은 아니다. 그는 특별히 사람들의 시선을 끌지도 못했고 크게 나서지도 않는 편이었기 때문이다. 언제부터인가 그가 발표하는 시(詩)에 귀를 기울이게 되고, 그와 대화를 나누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그는 예술 전반에 대해 깊은 안목을 갖고 있었다. 그림을 그리고 시를 쓰며 늘 책을 탐독하거나 이젤 앞에서 창작에 몰두하였다. 책을 읽다가 좋은 구절을 만났을 때, 글이 써지지 않을 때 그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물꼬가 터지듯 줄기가 잡혀 나갔다. 그리고 오늘처럼 나 자신에 대한 회의가 밀려오거나 성정을 다스리지 못할 때면 그의 시집을 펼쳐들곤 했다.

 

잠시 걸음을 멈추는 것이 중요해 / 해가 지는 것은

 해가 뜨기 위한 오늘의 일 / 가난한 사람과 함께

걸어 가고 있는 그리스도도 / 가끔은 서 있었어.

 

가만히 돌아보면 나의 일상은 분주하기 그지없다. 무엇인가 열심히 하고 있지 않으면 왠지 불안했다. 그 열심히란 느긋하게 여유를 갖지 못할 때 나타나는 다른 현상은 아닐까. 빠르게 지나가는 시간을 쫓아가다가 더 이상 따라갈 수 없는 한계를 느낄 때 그때마다 친구가 내게 다가왔다. 뜀박질을 멈추는 것이 중요하다고, 때때로 모든 일을 접어두고 쉬는 것이 오히려 충전의 기회가 된다고. 자신의 시와 염려섞인 채근으로 일으켜주곤 했다.

산국이 피어나기를 조바심하는 것은 내 기우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지난해에도 상강이 지나서 활짝 피어나지 않았던가. 늦가을의 갈색 주조와 대조되어 노란꽃은 더욱 맑고 깨끗해 보였다.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국화 향기가 먼저 달려들었고, 은은한 국화차 향이 온 집안을 가득 메웠다.

산국은 결코 서두르는 법 없이 올해도 피어날 때를 조용히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때가 설령 더디게 찾아온다고 하여도 묵묵히 자신을 지키고 가꾸는 은근함 때문에 더욱 귀하게 보이는지도 모른다.

친구는 지금 이 땅에 있지 않다. 나는 그가 시인으로서 모국어를 등지고 살아야 하는 것을 더 이상 가슴아프게 여기지 않기로 했다. 그리운 것을 참아내는 고통은 또 하나의 빛나는 시를 낳기 위한 진통일 것이므로.

오늘 아침 산국이 친구를 대신 해 주고 있다.

 

 

 

변진숙

수필공원 등단(91년).

공동 수필집 『수필산책』, 『송현 수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