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날 해질 무렵

                                                                                                        정부영

 여름날 해질 무렵은 햇살이 아침 창가를 찾아들 때와 비슷한 흐믓함과 기쁨이 있다. 태양도 자신의 열에 지쳐 시들어가는 저녁 나절,하루의 일과와 소임을 마무리하고 가벼운 해방감과 자유가 자리바꿈하며 휴식의 입구에 들어설 때는 바람도 선들선들 분다.

언젠가, 시골 마을 뒷동산 밤나무 그늘이 시원했고, 시야에 녹색 물결이 일렁이며 산자락을 타고 저녁 연기가 날아가고 있었다. 가슴에는 삶의 한순간에서 오는 가벼운 흥분과 희열이 일고 있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순간이 있구나.’

이제는 아파트 생활에 익숙해졌지만, 여름날 해질녘이 되면 긴 나무 벤치가 그립고, 상추쌈과 오이지가 있는 널찍한 평상 위의 저녁상도 그립다. 일어나서 단지내 근린공원으로 향한다. 바람이 가지 끝 잎파리를 훌치고 감미롭게 목을 스치며 줄지어 세워둔 차 사이를 빠져 나간다. 제법 많은 차가 저녁을 맞이한다. 지금쯤 많은 집에선 가족들이 귀가하여 샤워기가 뿜어내는 찬물로 열기와 땀을 식히고, 낮 동안의 바깥 일로 수런대겠지. 어디선가 도마 소리가 다듬이 소리같이 긴 여운을 남기며 퍼져 나간다. 불고기 굽는 냄새와 생선 익는 냄새, 된장찌개 냄새도 열린 창문을 빠져 나와 한데 엉켜 코끝을 간지럽힌다. 5층에 사는 주부는 서너 개의 비닐봉다리를 들고 허둥대며 눈인사만 하고 들어간다. 옆 동에 사는 이웃은 저녁밥을 지어놓고 가족이 오기를 기다리며 흰 강아지를 데리고 나온다. 무더운 날씨에 집안에서만 갇혀 있던 강아지는 말릴 틈도 없게 마냥 소리를 지르며 한참 이리 뛰고 저리 뛴 뒤에야 꼬리를 살살 흔들며 조용해진다. 서늘함을 찾아 나온 이웃과 설핏한 웃음을 지으며 두런두런 이야기꽃을 피운다.

여름 저녁 나절은 삶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보여 사람 사는 맛이 난다. 불볕 더위에 늘어져 잠들어 있던 생기가 되살아난다. 나른하게 권태에 젖은 꽃잎과 잎파리들도 바람결에 싱그럽게 피어나고, 하루의 긴장과 피로를 바람이 부드럽게 닦아주기도 한다. 생활에 뿌리를 박고 산다는 것을 깊숙히 느끼게 해주며 존재한다는 것도 알게 해준다. 이 순간이 축복이라고 느끼게 된다.

녹음이 우거지고 갖은 풀벌레가 살아 숨쉬고 삼라만상이 왕성하게 성장을 거듭하는 여름은 생명의 소리가 크게 들려온다. 나타나는 모든 현상의 핵  ─  생명의 아름다움, 생명의 소리를 들을 때의 환희, 움직이고 날아 다니는 모든 생명체의 근원과 자연이 하나가 되어 조화된 모습에서 행복을 느낀다.

있는 그대로가 싱그러운, 풍요로운 여름날에 발가벗은 듯 순수한 마음으로 순간순간을 기쁘게 살자고 다짐해 본다. ‘행복은 자기 의지대로가 아닌 내면의 생명에 의해 움직여야만 온다. 내면에서 내 꽃을 피워라’는 말을 되뇌어 보며…….

나무 속에서 쓰르라미가 있는 대로 목청을 돋구고, 새가 화살같이 빠르게 그림자도 없이 공중에 떠오른다. 노을빛이 집집마다 박혀 있는 작은 창 유리에 반사되어 프리즘같이 서로 다른 색깔을 내고 있다. 담쟁이가 1층 창 밑까지만 기어오르다만 제법 큰 화단에는 고목나무며 아스파라거스, 동백, 야자수까지 햇볕을 쬐러 나들이한다. 사이사이에 자연 형상의 큰 수석들이 빗물까지 고인 채로 운치를 더한다. 생명 있는 모든 것은 숭고하고 아름답다. 돌 벤치에 기대 앉아 하늘을 본다.

내게 생명을 낳아준 부모를 속 깊이 그리워하고

생명을 길러준 스승께 감사하며

생명을 이어가게 하는 배우자를 살펴보고

생명을 나누어 가진 벗을 생각하며 웃는다.

 

저만치 몇 마리의 비둘기가 먹이를 찾으며 구구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