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초회 추천 -

 아버지의 중절모

                                                                                               전계숙

 하얀 모시 남방에 중절모를 쓴 노(老)선생을 처음 뵈었을 때, 나는 오래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를 떠올렸다. 키가 훤칠하고 단아하던 생전의 아버지가, 15년의 세월을 건너뛰어 거기 서 있었다. 여름이면 모시 옷에 왕골 모자를, 겨울엔 회색 두루마기에 실크 중절모를 쓰시던 아버지였다.

좋은 일이 있거나 마음의 여유가 생길 땐 아버지가 생각난다. 괴롭고 힘들 때 어머니가 그리워지는 것과는 달리, 아버지는 연민의 정으로 돌아보아진다. 어머니를 먼저 보내고 노년을 홀로 지내던 아버지의 적막함을 덜어드리지 못한 까닭이다.

아버지는 조용하고 맑은 성품을 지녔었다. 장난을 하느라 식구들에게 거짓말을 해놓고 빙그레 웃음을 못참던 아버지를 생각하면, 생활에 부대껴 모가 졌던 마음에 훈기가 돈다. 어머니의 산소를 고향에 두고 서울로 올라오자, 아버지는 장죽에 엽연을 태우는 일이 잦아졌다. 아버지의 장죽은 서서히 파이프로, 또 다시 궐련으로 바뀌었는데, 모시 옷과 중절모 그리고 조용함, 이것들이 아버지의 트레이드 마크로 내 마음 속에 새겨져 있다.

추운 날, 외출에서 돌아온 아버지의 모자를 받아들면 포근한 감촉이 손바닥을 타고 가슴으로 전해 왔다. 그렇듯 아버지의 모자 속에는 알지 못할 아늑함이 들어 있었다. 조금씩 사위어가는 아버지의 등, 자식들에게 짐이 될까 안존한 모습으로 계시던 아버지의 뒷모습에 어리는 그늘을 중절모가 걷어 주고 있었다.

“군자는 비가 와도 뛰지 않고, 추워도 곁불을 쬐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선인들이 염치와 체면을 목숨보다 소중히 여긴 말이지만, 아버지도 그런 성품을 지닌 분이었다.

보는 이의 마음을 꿰뚫는 듯한 안광을 온화한 표정으로 감싸고 있는 영정 속의 나의 고조부는 방건을 쓰고 있다.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할 때 뇌물을 바치고 관직을 샀던 이들이, 다투어 3층 정자관을 썼다는 말이 전해 온다. 그 3층 정자관을 ‘쌍놈관’이라 하여, 뜻 높은 선비들은 정자관을 외겹으로 만든 방건을 써서 오히려 존경을 샀다는 얘기를 고조부의 기일에 들은 일이 있다. 친정의 서재에는 지금도 그 고조부가 쓰시던 갓이 갓집 채로 모셔져 있다. 그분이 남긴 유품 중에서 그것만이 유독 해를 거듭하면서 관심 밖으로 밀려나 바래고 낡아져간다. 이제는 자취를 찾아보기 어려운 선비같이, 그 갓도 형체가 곧 스러질 것 같아 안쓰럽다. 그것은 마치 내 마음 속에서 점점 사라져가는 아버지의 형상 같기도 하다.

서울로 이사를 한 후에도 아버지가 계시는 사랑에는 갓을 쓰고 도포를 입은 고조부의 제자들이 찾아들었다. 남의 아녀자와 얼굴을 가까이 대하는 것이 예(禮)가 아니라 하여, 방에 앉아 세수를 하고 상투를 풀어 정발(整髮)하는 것을 나는 자주 보았다. 그때는 그들이 엄히 따지는 예의와 체모가 시대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버리지 못하는 구습의 잔재로 내게 비추었다. 그리고 내가 양반의 후예라는 자부심에 회의가 일었다. 또한 도덕이라는 틀 안에 행동을 얽매려는 유교 사상이 완고하고 고루하게만 보여, 20대의 한때는 그 울타리를 넘으려 무진 애를 썼다.

여고 시절, 부모님을 학교에 초청하는 행사가 있던 날이었다. 두루마기 차림으로 학교에 오신 늙은 아버지가 조금은 부끄러워서, 나는 쭈뼛거리며 제대로 안내를 못하였다. 교실에 잠깐 올라갔다 내려와 보니 아버지가 보이지 않았다. 집에 오니 담담한 표정으로 앉아 계셨다. 송구스러운 마음에 아버지의 얼굴을 제대로 대할 수가 없었다. 그후 몇 해 지나지 않아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말았다. 그로부터 지금까지 나로 하여금 선비의식을 모르는 체하고 신사고에 편승하려 했던 지난날을 후회하며, 뒤늦게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순간들로 점철되어 왔다. 먹고 사는 일이 수신제가보다 시급한 현실이 되어 버린 오늘날, 나는 시대를 거슬러 과거 지향에 사로잡혀 사는 사람은 아닌가 모르겠다.

가끔 지난 역사와 다가오는 역사를 아버지가 끈처럼 잇고 계셨다는 생각을 한다. 아버지는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아쉬움으로 중절모를 쓰셨던 것은 아닌지. 급격하게 몰려드는 현대 문물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던 아버지로서는 그 충격을 완화하기 위한 나름대로의 방법이었는지도 모른다.

첫 월급을 타고 최고급의 중절모를 사 드리겠다는 나의 꿈이 이루어지기 전에 아버지는 돌아가셨다. 그리고 언제인지 모르게 아버지의 모자도 슬그머니 없어져 버렸다. 나이가 들수록 아버지의 모자를 간수하지 못한 것이 아쉬워진다. 아버지가 몹시 그리워 눈시울이 더워오는 날엔, 백화점의 모자 가게를 기웃거려 본다. 그러나 전과 같은중절모자는 눈에 잘 뜨이지 않는다.

손에 들었을 때의 촉감이 포근하고, 아버지의 개결(介潔)한 인품을 유감없이 드러내는 그 중절모자를 나는 최근에야 더러 만난다. 중절모를 써서 더욱 아버지를 닮은 노선생을, 나는 아버지의 모습으로 기다리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