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표

                                                                                                 고봉진

 갓 중학교에 입학했을 때다. 학급 담임 겸 영어 담당교사가 하루는 영작문 쪽지 시험을 냈다. 우리들이 영어를 얼마나 잘 습득하고 있는지 개별 파악을 해본다는 취지였던 모양이다. 그 다음 날 선생님은 한 사람 한 사람 차례로 앞으로 불러내어 채점을 한 시험지를 나누어 주면서 큰 소리로 평을 해주었다.

나는 그때 동년배보다 키가 큰 편이라 다른 아이들보다 비교적 빨리 호명을 받았다. 영작문이라 해도 교과서에 있는 짤막한 문장들만 외우고 있으면 그대로 답이 되는 문제였다. 10문제 중에서 답을 잘못 쓴 것이 하나도 없다고 생각하고 있던 나는 당당하게 선생님 앞으로 나갔다.

그런데 느닷없이 “야! 너는 어떻게 공부를 했기에 영어 첫 시험에 빵점을 받느냐?” 하는 뜻밖의 호통을 당했다. 그럴 리가 없다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시험지를 받아 보니, 10문제 모두 답안마다 문장 끝에 피어리드를 찍지 않았다는 표시를 하고, 사정없이 빨간 X표를 쳐놓았었다. 한 반 아이들 대부분이 만난 지 얼마 안 되는 서먹서먹한 얼굴들이다. 그들에게 부끄럽기도 하고 한편 억울하기도 해서 오만상을 짓고 있는 나를 향해 모두들 사정도 모르고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그때는 왜 문장 끝에 마침표를 찍지 않으면 틀린 답이 되는 것인지 이해가 잘 가지 않았다. ‘이것은 연필입니다’ 하는 문장에 마침표가 없으면 그 판단이나 표현이 아직 완전히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서 다른 말로 변할 수도 있기 때문에 잘못된 답안이라는 선생님의 논리에 납득이 가기까지는 어린 소견으로 꽤 많은 시간이 걸렸다.

나는 그 뒤로 영어뿐만 아니라 어떤 글이든 마침표를 찍는 것을 잊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손으로 글을 쓸 때는 혹시 마침표를 쉼표로 오인하지 않을까 걱정이 되어, 좀더 분명하게 보이도록 흔히 가로쓰기 문장에서 쓰는 온점을 찍지 않고 세로쓰기 문장에서 사용하는 속이 빈 고리점을 커다랗게 표시하는 버릇이 붙었다. 마침표에 신경과민이 된 것이다.

하나의 문장은 마침표를 치면서 일단 마감이 된다. 그 서술이 어떤 사실을 옳게 반영하든지 말든지 하는 것은 별개 문제다. 그 문장 뒤에 바로 앞의 서술을 뒤엎는 문장을 놓을 수도 있다. 그런 하나 하나의 완결된 문장을 이어가며 사람들은 여러 가지 이야기를 쓰고 있다. 요즘은 픽션이든 논픽션이든 이야기 제일 끝에 찍힌 마침표에 많은 관심이 가고 있다. 화자(話者)가 이야기를 풀어가다가 어디에서 끝을 맺는가 하는 것으로 그 이야기의 성격이 너무 달라지는 경우가 흔하기 때문이다.

세계에 널려 있는 많은 이야기나 소설, 영화들에서 그 뒷이야기가 궁금한 것이 한둘이 아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가 반세기가 지나서 다른 작가에 의하여 그 후편이 이어지기도 한다. ‘춘향전’은 이도령의 어사출두로 춘향이 죽을 자리를 벗어나 두 사람이 다시 맺어지는 장면에서 만사가 경사스럽게 끝이 난다. 그러나 그 후일담은 상상만 해보아도 그리 간단치 않다. 한때 기적(妓籍)에 올랐던 춘향이니까 과연 정실(正室)로 존중을 받고 부군과 끝까지 해로를 할 수 있었을는지, 그 시절의 일반적인 풍습대로 만약 시앗을 보았다면 그 매서운 성품으로 보아 그것을 참고 견디는 부덕을 발휘할 수 있었을는지 자못 의심스럽다. 만약 그 이야기에 정식으로 속편이 이어졌다면 ‘춘향전’의 성격도 많이 달라졌을 것이 뻔하다.

어릴 적 어른들을 졸라 듣던 옛이야기도 흔히 ‘잘 먹고 잘살았단다’ 하는 말로 끝이 난다. 그 싱거운 결말이 아쉬워 그 뒤를 이야기해 달라고 졸라 보아도 결국 ‘잘살다 늙어 죽었을 것이다’라는 맥 빠진 추측이 허무하게 보태질 뿐이다. 어떤 이야기든 마지막 마침표를 찍는 것을 늦추다 보면 ‘잘살았다’는 이야기가 ‘잘  죽었다’는 이야기로 바뀌어 버리는 것이다. 『레 미제라블』과 같이 아무리 흥미진진한 이야기도 주인공 장 발장이 임종을 하고 나면 그 뒤는 별로 궁금할 게 없어진다. 그래서 보통 한 인물의 이야기는 그의 죽음으로 대단원(大團圓)을 이룬다.

개관사정(蓋棺事定)라는 말이 있다. 사람이 죽어서 관에 들어가 그 뚜껑을 덮고 나면 그 인물에 대한 평가가 결정난다는 뜻이다. 죽은 사람은 더 이상 다른 일을 저질러 스스로 변할 여지가 없어진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나 역사 속에 산 실제의 인물들의 경우를 보면 사람이 죽는다고 바로 그 사람에 대한 평가까지 영구 불변하게 확정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사람에 따라서는 세월이 흐르고 역사가 바뀌면서 그의 이야기가 이어지면서 자꾸 변색이 되어간다. 흔히 재해석이라는 말로 통용되는 경우의 이야기다.

동구 변혁의 소용돌이가 지나간 뒤에 마르크스, 레닌과 같은 이미 죽은 인물들이 어떤 새로운 평가를 받게 되었는지, 그것을 지켜보는 많은 사람들이 오히려 그들에게 연민의 정을 느낄 정도로, 그 변화의 추이가 가히 비극적이다 못해 희극적이다. 아직 그들에게 최종적인 판정을 내리기에는 흐른 세월이 너무 일천하다고 할 수도 있지만, 일단은 총 마침표 찍는 것이 뒤로 너무 늦춰졌다고 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들의 의도와는 전혀 무관하게 일생을 ‘잘마쳤다’던 것이 ‘잘못마쳤다’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니 어떤 사람이나 그 사람 이야기는 마침표를 찍는 시점이 중요하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리고 특히 최근에는 세계 곳곳에서 그리고 우리 주변에서 여러 가지 변화가 얼마나 격심하게 일어나는지, 나날이 벌어지는 여러 가지 일들을 지켜보면서 자신 있게 그 시비를 가릴 수 있는 것들이 드물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또 어떤 일에서 가해자나 피해자가 명확하게 보이는 경우에도 아직 당신들 이야기에는 마침표를 찍기가 이르다고 혼자 중얼거리기도 한다. 내 일이든 남의 일이든 마음 속으로나마 마침표를 찍어보는 일이 참으로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는 세상이라는 느낌이다.

나의 이야기는 몇몇 나를 기억하는 사람들에 의하여 어떤 식으로 마침표가 찍혀질까? 이제는 ‘여생(餘生)’이라고 불러야 마땅한 삶을 살고 있으면서도 당혹스럽고 쓸쓸한 심정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