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내동생

                                                                                                南基樹

 6·25 동란이 일어나기 두 달 전, 막내동생이 죽었을 때의 나이는 네 살을 댓 달 앞두고 있었다. 이 이야기는 외견상으로는 이보다 두어 해 전 막내동생이 두 살쯤 되었을 때의 일에 관련이 있어 보이나, 동생이 머물다 간 짧은 삶 전체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하겠다. 광복 뒤의 혼란스럽던 시국 탓으로 아버지는 그때에 자주 집을 비웠고, 어머니는 공장에 나가서 일을 해야 했다. 초등학교 이학년이었던 나는 동생을 보느라고 학교를 쉬고 있었다.

막내동생은 머리가 크고 두 눈이 동그랗고 컸으며 아주 착했다. 막내동생은 나이에 비해서 말을 잘 알아들었고 상당한 이해력도 있었던 것 같다. 젖을 떼기 전에 천연두에 걸린 어머니가 방을 따로 쓴 적이 있었다. 옆방에서 나와 함께 있던 막내동생은 미닫이를 조금 열어놓고 어머니를 바라보고는 했다. 젖을 빨고 싶어하는 막내아들의 마음을 아는 어머니는 “엄마가 아야 하니까 와서 만져만 보고 가라”고 했다. 막내동생은 얼른 어머니 곁으로 달려가서 젖을 만지작거리며 행복해 했고, “엄마 아야 해?” 하고 어머니에게 물어 보면서도 어머니 곁을 떠날 염이 없어 보였다. 그러다가도 어머니가 이제 그만 형에게 가라고 하면 막내동생은 “엄마 아야해?” 하고 어머니의 의중을 확인이라도 하려는 듯이 다시 물어 보고는 이윽고 내게로 돌아오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아침 일찍 공장에 나가면 해가 질 무렵이 넘어서야 집에 돌아왔다. 춥고 배가 고픈 것은 어머니도 우리 두 형제도 마찬가지였다. 어둑한 밤이 되어서야 방에 불을 넣고 밥을 짓는 어머니를 보는 것이 안 좋았던지 그때 나는 아무에게서도 배운 바 없이 밥을 지어서 따뜻한 아랫목에 묻어두고 어머니가 돌아오면 바로 저녁을 먹을 수 있도록 했다. 또 누룽지를 긁어서 막내동생에게도 주고 나도 먹고는 했는데, 밥이 질거나 타거나 상관없이 누룽지 맛은 언제나 좋았다. 어머니는 그런 나를 칭찬도 하지 않았고 혼내지도 않았다.

그 시절에 사람들은 대부분 힘들게 살아가고 있었지만 우리 나이 또래의 아이들에게는 언제나 즐겁고 신나는 일만 일어났던 것 같다. 어느 날인가 밥을 해서 방 아랫목에 묻는 참이었는데, 늘 있던 일처럼 아이들이 와서 놀러가자고 나를 꾀었다. 언제나 그랬듯이 아이들의 놀이 계획은 듣기에 꽤 재미가 있을 듯했다. 마음이 동한 나는 막내동생에게 형이 잠깐 나갔다 올 터이니 문 밖에 나가지 말라고 이르고는 아이들을 따라 나섰다. 재미에 묻혀서 나는 막내동생이 집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까마득하게 잊기가 일쑤였다. 이럴 때면 막내동생은 사립문에 기대앉아 형이 돌아올 때까지 한없이 기다리고는 했다.

아무리 놀이에 몰두해 있더라도 어둑해지면 막내동생 생각이 났다. 그날도 깜짝 놀라서 집으로 돌아와 보니, 저녁이 이슥해진 뒤라 막내동생은 방안으로 들어와서 묻어둔 밥을 꺼내 먹다가는 숟가락을 손에 든 채 쓰러져 자고 있었다. 밥풀이 볼이며 방바닥에 널려 있었는데 그 모습을 보고는 순하기만 한 막내동생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그날 따라 처음으로 막내동생이 가여운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포대기를 꺼내 덮어주고 베개를 베어주고 난 뒤에 혼자서 울먹이다가 나도 모르게 어머니가 올 때까지 잠이 들었었다.

막내가 태어난 때는 밤이었다. 아버지는 집을 떠나 있었다. 몹시 아파하는 어머니를 보고 놀라 있던 나는 어머니가 죽지나 않을까 걱정 속에 묻혀 있다가 어머니가 시키는 대로 이웃으로 달려가 알리자 길 건넛집 할머니와 아주머니가 와서 출산 뒷바라지를 모두 해주었다. 집안에 사람들 소리가 나고, 어머니가 살아났고, 동생이 새로 생겼으므로 나는 막내동생이 태어나던 그날 밤 아주 신이 났었다.

막내동생이 죽던 때는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와 있었고, 아버지도 그때는 집에 있었다. 어머니는 그때까지도 공장에 다니고 있었는데, 어머니의 품을 공장에 빼앗긴 막내동생은 추운 봄철에 만난 홍역중에도 어른들의 돌봄이 없이 물장난으로 하루 낮을 보내고는 했었다. 그러다가 폐렴을 얻어 어린 몸이 죽던 날은 쌀쌀하고 흐린 오후였다. 어른들이 밖에 나가 있으라고 해서 문 밖에서 머뭇거리고 있던 나는 손바닥만한 조각을 창호지에 붙여 낸 유리를 통해 막내동생의 임종을 훔쳐보았다. 훌쩍이며 있던 어머니가 “갔나요?” 하고 나직이 묻자 아버지가 머리를 끄덕이는 것이 보였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아무 말이 없었다. 막내동생은 잠이 든 것처럼 움직임이 없이 조그만 포대기에 덮여 있었다. 창백한 것 외에는 나에게는 아무런 차이가 없어 보였다.

작은 구멍가게를 열고 있는 수염이 긴 통장 할아버지가 새벽에 와서 막내동생의 조그만 몸을 가마니 같은 것으로 싸 지게로 내갔다. 아버지가 지게 뒤를 따라갔는데, 막내둥이의 몸을 묻고 온 뒤로 아침이면 어머니가 아버지를 나무라는 소리가 잠결에 들리고는 했다. “찾아가 밤을 새우고 오면 죽은 애가 돌아와요? 옷만 버려놓을 뿐이지…….”

막내동생이 죽은 뒤에도 어머니는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지만 아버지는 어린 몸을 내다 묻은 곳을 밤마다 찾아가 새벽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왔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인가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말하는 어조가 달라졌다. “요즈음은 왜 안 가느냐”고 핀잔하는 투였다. 아버지 말로는 “달 밝은 밤에 산새 소리가 너무 아프더라”는 것이었다. 후일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 끝에 어머니는 “그때 정을 뗀 모양이더라”고 한 마디 보탰다. 죽은 동생이 넷 중에서 제일 낫다고 어머니에게 몇 번이고 말했을 만큼 아버지는 막내동생을 아끼고 사랑했던 것 같다. 아버지도 막내동생도 죽은 뒤 몇 해가 지나서 외롭고 힘들게 살던 어머니가 말을 안 듣는 우리 남매에게 이 말을 하는 때면 “죽은 걸 뭘 해. 살아 있는 우리가 낫지” 하고 볼멘소리로 화를 내고는 했지만, 형제가 없는 나로서는 그럴 때마다 죽고 없는 막내동생이 보고 싶었고 나도 모르게 풀이 죽고는 했다.

그렇게 7, 8년이 지나서 고등학교 졸업반이던 해의 어느 날, 막내동생을 꿈에서 처음으로 보았다. 늦은 저녁에 아이들과 어울려서 놀다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 막내동생이 숟가락을 손에 쥔 채로 쓰러져서 밥풀을 널려놓고 잠들어 있던 옛날의 그 모습과 장면이었다. 나는 그날 밤 꿈에서 깨어나 날이 새도록 훌쩍이며 울었다. 형에게 생떼 한 번 쓰지 않았던 어린 동생의 그때 정경이 아프도록 저려왔었다. 못난 형만 살아 있는 것이 미안하게 여겨져서 그때의 내 잘못이 더욱 후회스러웠으며, 어린 동생의 그 봄날 죽음이 억울하다는 생각도 들었었다.

몇 년이 지난 뒤 학부 생활중에 똑같은 장면의 막내동생 꿈을 해를 건너가며 두 번 더 꾸었다. 그때에도 잠에서 깨어난 나는 날이 새도록 눈물을 흘리며 잠을 이루지 못했다. 나보다 여섯 살 아래인 막내동생이 살아 있다면 비명에 가버린 아버지의 뒤를 이어 그 재주를 드러내 보일 수도 있을 터인데… 하는 혈육에 대한 그리움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고, 티없는 어린 나이에 막내동생이 가게 된 것도 어른들의 잘못이라 생각되어서 막내동생의 죽음이 더욱 가엽고 안타까워서였을 것이다. 여기에 더해서 요절했다는 아버지의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막내아들을 보낸 뒤에 ‘밤이면 막둥이를 묻어놓은 그 황토 더미를 찾아가 밤새도록 뒹굴다가 새벽녘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왔다’는 아버지의 여린 마음이 짚이었기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눈물이 맺히고 있다. 이런 눈물이란 굳이 막내동생 하나 때문에서라기보다는, 그가 네 해를 못다 채우고 돌아 간 기간이 지금의 나보다도 젊었던 삼십대 초반의 어머니와 아버지로서는 8·15 광복 후의 혼란에 삶의 모든 것을 빼앗기고 있던 시기였고, 막내동생이 간 지 몇 달 뒤에 일어난 난리의 와중에 아버지마저 묻힌 곳조차 모르게 유명을 달리했으므로, 막내동생의 삶 앞뒤와 주위로 얽혀 있던 가족의 아픔이 깊이 새겨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더욱이 이 아픔의 한구석에는 막내동생과 내가 함께 보낸 천진난만하던 동심의 시절에 대한 그리움이 배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