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의 끝

                                                                                                윤소영

 8월은 썰물이 시작되려는 바다와도 같다. 점차 수위를 불려온 더위가 만조에 이르러 있다. 밀물의 끝은 썰물의 시작. 이제 팽팽했던 열기가 조금씩 빠져 나가기 시작하리라.

8월의 땡볕이 7월에 못지 않지만, 기세를 더해가는 7월의 더위와 절정에 이르렀다 사그러가는 8월의 더위는 그 성격이 사뭇 다르다.

7월의 하늘은 가뭇하게 내려와 품안의 증기로 대지를 뒤덮는다. 습한 열기는 숨을 막히게 하고, 끈적끈적한 공기는 집요하게 들러붙어 사람을 지치게 만든다. 회백색 하늘에는 바람의 실마리조차 보이지 않고 벌떼마냥 웅웅대며 달려드는 한낮의 더위는 정신을 멍하게 한다.

이에 비해 8월의 공기는 한결 가볍다. 초순만 넘기면 조석으로 물기 걷힌 바람이 불어온다. 한여름의 터널 속이라도, 저편 끝에 가을로 열려진 출구가 보이기에 기온이 높아도 7월보다 참아 내기에 수월하다. 중순에 이르면 더운 바람에 가을 냄새가 섞여든다. 하늘도 해도 높아지고, 청록색 대지에는 보라색 기운이 감돈다. 입추와 말복을 고비로 태양의 기세가 눈에 띄게 꺾일 즈음, 나는 불현듯 쓸쓸함에 휩싸이곤 한다. 여름이 가길 기다려 왔건만 무더위와도 정이 든 것일까. 가는 여름을 다시 붙잡고만 싶다.

어릴 때부터 나는 8월을 좋아했다. 짙푸른 나무와 세찬 소나기, 매미의 울음소리도 나를 끌었지만, 무엇보다 생일이 8월에 들어 있어 유난히 기다렸던 것 같다. 생일날 어머니는 백설기를 찌고 과일을 사 주셨다. 평소에는 포도며 복숭아를 마음껏 먹을 수 없었는데 생일날만큼은 실컷 먹을 수 있었다. 이때는 과일과 야채가 풍성하다. 사람들도 떠들썩해진다. 그늘 밑 평상에 모여들어 수박을 먹기도 하고, 장기를 두기도 하는 것이다. 잔칫상처럼 푸짐하고 왕성한 8월의 분위기가 나는 좋았다. 해마다 8월이 가까워오면 흐뭇한 기대감으로 설레곤 했다.

학창 시절에도 8월에 대한 글을 쓴 적이 있다. 열정에 불타면서도 안으로는 겸허하게 열매를 준비하는 계절이라고 그 미덕을 예찬했던 것이 기억난다. 그때에는 8월이 뿜어내는 강력한 생명의 이미지에 매료되었다. 삼복 더위의 나날을 구체적으로 좋아했다기보다 여름이 지닌 추상적인 의미를 사랑했던 것이다.

하지만 해가 갈수록 계절에 대한 감각이 무디어졌다. 청록색 함성을 내지르며 달려드는 숲을 보아도, 불볕더위를 제치고 일어선 꽃을 만나도, 언제부터인가 더 이상 감동이 일지 않았다. 자연의 변화에 무심치 않으려던 긴장도 생활 속에 묻혀갔다. 음식이 상하고 파리와 모기가 설쳐대는 여름은 주부에겐 성가신 계절이다. 또 여름에는 몸이 잘 붓고 소화가 안 되어 기분이 어두운 날이 많았다. 8월을 좋아하던 나였지만 짜증스런 가운데 시간을 보내곤 하였다.

그런데 올 들어 이상스레 8월에 대한 감회가 애틋하다. 폐부를 찌를듯 내리꽂히는 정오의 햇살을 받으며 무작정 걷고 싶기도 하고, 땅거미가 내릴 무렵 나무 밑 벤치에 앉아 한없이 시간을 보내고 싶기도 했다. 여름의 끝에 서 있다는 것, 그 ‘끝’이라는 단어가 가슴 깊숙이 파고들었다.

스물다섯을 넘기면서 인체는 노화된다고 하는데, 마흔을 앞둔 지금에서야 나는 내 인생의 여름이 저물고 있음을 자각한 것이다. 30대 중반을 넘기면서 젊은 기분을 유지하였던 것은 입추와 말복을 넘기고도 얼마간 더운 날이 계속되는 것과 같은 이치이리라. 이제는 아무리 붙잡아도 인생의 여름을 돌이킬 수 없음을 실감한다.

열정의 계절인 30대에는 안에서 몰아쳐대는 욕망에 휘둘려 매사에 안간힘을 쓰며 자주 자신을 괴롭히곤 했다. 정신없이 바쁘고 시행착오를 되풀이하고, 기쁨도 크고 좌절도 컸다. 젊음의 한가운데에선 그 젊음을 부담스러워하며 인생을 관조하는 여유와 너그러움을 동경했는데, 30대의 끝에 서서 보니 젊은날의 욕망이야말로 인생을 만들어 가는 동력이었음을 깨닫는다.

8월이 가고 있는 지금, 나는 늦여름의 바람이 안겨주는 야릇한 우수와 애상에 젖어 있다. 뜨겁던 태양의 열로부터 놓여나는 것이 한편 시원하면서도 많이 허전하다. 올 8월이 가고 나면 ‘미련’이나 ‘후회’, ‘회한’, ‘추억’ 따위의 단어들이 가슴 속에 하나씩 둘씩 들어앉을 것 같다. 간절한 그리움의 맛을 비로소 알게 될 것도 같다. 녹음은 점차 단풍에게 자리를 내어 주고…….

이제 나는 여름이 가는 것을 아쉬워하기보다 다가오는 가을을 향해 마음을 열어야 하겠지. 여름은 8월과 함께 끝나는 것이 아니라, 가을의 열매 속에서 익어가는 것이 아니던가. 이런 생각을 해보지만 여름을 보내는 서운함은 가시질 않는다.

8월 말의 저녁, 나는 밀려가는 젊음의 한 끝을 애잔한 눈길로 바라보고 서 있다. 바람이 불어와 머리 위에 머물던 열기를 소리도 없이 흩어놓는다. 해는 기울고 여름은 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