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교 밑

                                                                                               劉庚煥

 육교 밑에 작은 장이 섰다.

장이라고 하면 옛 시골 장을 생각할지 모르지만 여기서 이야기하는 장은 고작 아낙 여남은 명이 쭈그리고 앉아 채소를 파는 장이다.

애호박, 늙은 호박, 호박순 묶음, 오이, 늙은 오이, 가지, 자루옥수수, 열무배추, 콩, 깐콩, 들깻잎……. 뭐 이런 푸성귀들이다. 그래도 애써 장이라고 우기고 싶은 것은 어인 일인가.

이들이 육교 밑에 자리를 잡은 것은 그늘 때문이리라. 그늘도 있으면서 행인도 있는 곳을 눈여겨보다 누군가 먼저 자리를 집았겠지 싶다. 그러다 하나 둘 늘어나 이젠 그늘을 다 차지하는 여남은 명으로 불어났을 것이다.

그들은 거의 똑같이 신문지나 보자기를 펴놓고 그 위에 푸성귀를 소중히 올려놓고 판다.

이 육교 밑에 이런 장은 어울리지 않는다. 일산 신도시 고층 아파트들이 치솟아 있는 강촌마을 한가운데, 분수가 춤추고 있는 공원에서 다음 블록인 정발산 쪽으로 넘어가는 육교가 걸려 있는데, 바로 이 그늘에 이토록 초라한 장이 서니 격이 어울리지 않는다.

신도시 주민을 진공 청소기처럼 빨아들이는 거대한 판매시설, 까르푸, 뉴코아, 이마트, 르까르프 따위 최신 슈퍼들이 즐비한 곳에 시골 같은 장터가 감히 자리를 잡다니…….

거대한 반사거울 앞에 쉼없이 뿜어나오는 습기를 입고 촉촉하게 포장돼 있는 채소와 비교나 될 것인가, 경쟁은 어림도 없는 일이다.

그러나 내겐 부지런히 손을 놀리고 있는 여남은 명의 그 모습이, 어디서 떼어온 풍경화 한쪽 같기도 하고 연극 무대로 가설한 간이 무대로 보이기도 한다.

낙후되어도 아주 낙후된 시골 정서의 복제 분위기 같은 인상이 내겐 고향 풍경으로 다가온다. 모처럼 이발을 하고 가벼운 걸음으로 지름길을 피해 큰 길로 거닐어 나오다 장이 선 것을 대번에 알아차린다. 그리고 이끌려 온 것이다.

그 전에는 오늘처럼 여유 있게 다니지 않아서 이런 진풍경을 못보았던 것일까, 아니면 어제 오늘 새로 생긴 장이기에 못보았던 것일까.

여남은 명의 아낙들 표정 또한 연민의 정을 일으킬 만큼 초라하다. 쪼그라든 흙색 얼굴에 새털 같은 한 줌의 머리카락이 얹혀 있다. 이런 모습에서 한때 힘들어 하던 어머니의 옛 표정을 떠올린다.

어머니가 길가에 나앉았던 일은 없다. 하지만 6·25 때 우리들 앞에서 망연자실한 표정을 감추지 않고 한숨을 거푸 내쉬던 모습은 아직 지워지지 않고 남아 있다.

어머니는 결코 그럴 수 없는, 아니 그래서는 안 되는 여인으로 생각해 왔다. 그러기에 한숨 쉬는 표정이 그리도 충격적이었으리라.

언제나 어디서나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나면 어머니의 그때 모습이 떠오른다. 힘들게 살아가는 여인의 원형으로 어머니가 자리하는 것은 어인 일인가.

오늘도 육교 밑의 여인들을 보면서 그 그림 위에 포개지는 어머니를 떠올린다.

“…그 호박순 묶음 얼맙니까?”

무의식에서 내뱉는 말투엔 이북 사투리가 섞인다. ‘얼마지요?’ 하는 대신 ‘얼맙니까?’ 하며 ‘까’를 끝에 붙여 묻는다.

나의 제의에 아낙은 짐짓 못 들은 척 한동안 대답을 않고 묻는 내 얼굴을 쳐다보기만 한다. 얼굴의 크기에 비해 눈이 작고 깊은 편이다. 오그라든 눈, 이 두 눈에서 그리도 간절한 눈빛이 나오다니…….

아낙은 속으로 얼마를 부를까 망설이는 모양이다.

‘이 손님을 그냥 보낼 수는 없어.’

아낙의 차림새에 비하면 슬픈 눈빛이지만 그 나이에 비하면 오히려 다정한 눈빛이다.

“한 단에 천 원씩인데, 두 단 산다면 백 원씩 깎아드릴께요.”

듣다 보니 일산에서 가까운 구일산이거나 문산 또는 파주 아줌마일 듯싶다. 말씨와 말투는 속일 수 없는 원산지 증명이다.

지난 팔월 물난리 때 잠겼던 채소밭에서 그나마 건져낸 소출이 아닌가 싶어 측은한 생각이 뒤미친다. 장이 왜 육교 밑에 들어선지도 비로소 알 만하다.

내 살던 황해도 장연에도 해마다 여름이면 태풍이 왔다. 장연이 갯가라서 태풍을 겪는 일을 당연지사로 여겼다. 태풍이 몰아치면 꽃 떨어진지 얼마 안 되는 손가락 크기의 호박들이 여기저기 나무울타리 밑에 나뒹굴었다.

그런 호박순을 걷어다 연한 부분을 찌개에 넣고 끓였다. 호박잎은 밥솥에 쪄내어 쌈을 싸 먹었다. 이런 까닭에 여름철 향수의 미각이 생각나면 맨 먼저 호박쌈 맛이 입맛을 다시게 한다. 그리고는 어머니의 손맛을 그리워한다.

호박순 묶음을 놓고 쳐다보는 아낙은 잠시도 내게서 눈길을 떼지 아니한다. 옆의 푸성귀나 멀리 놓인 것에 눈길을 슬쩍 돌리면 눈길이 자석처럼 따라온다. 이런 눈빛을 도저히 거절할 수 없다는 생각에 이르자, 이발료를 내고 받은 거스름돈을 내준다.

신문지를 4분의 1로 잘라서 세모꼴로 접더니 호박순을 말아서 건네준다.

이렇게 흥정을 마치고 나니, 안 보이던 사람들이 그새 어디서 나왔는지 여기저기서 흥정을 시작한다. 누군가 흥정을 시작하면 외면하던 사람까지 기웃거리게 마련이다.

한 걸음 물러나도 속마음이 흐뭇하게 더워온다. 호박순을 내게 판 아낙의 입안이 훤히 들여다보이는데, 놀랍게도 치아가 하나도 없다. 벌린 입으로 내게 뭐라 하건만 말이 새어서인지 알아들을 수 없다. 고맙다는 것이겠지…….

그들이 웃을 수 있는 기쁨이나 즐거움이란 어떤 것일까. 앞치마처럼 펼쳐놓은 푸성귀를 받고 싶은 값에 몽땅 팔아 치우는 것일까. 누군가 당나귀라도 타고 나타나 왕자처럼 비닐 봉지 가득히 싹쓸이로 팔아주고 간다면……. 그런 인자한 노신사가 그들 앞에 반드시 나타나리라.

물난리 때 강촌공원 검은 바닥엔 장대비가 내리꽂혀 자욱하게 물방울이 튀었는데, 오늘은 강한 햇살이 호수만큼 넓은 폭으로 내려 앉아 눈부신 아지랑이를 피워올린다.

그 한쪽 끝에 흰 옷의 아낙들이 박수근의 그림이듯 그늘 속에 앉아 지나가는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그들의 눈빛이 간절하지만 강한 햇살에는 어림도 없다.

호박순을 든 채 정신 나간 사람으로 그냥 거기 서 있는 내 모습을, 마침내 나의 그림자로 내가 바라본다. 육교 그림자가 어느 새 기울며 돌아 내 그림자도 작아진다. 그림자도 곧 사라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