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릇의 미학(美學)

                                                                                                      鄭木日

 고려 청자(靑磁)

티끌 하나 묻지 않은 맑고 푸른 우리 나라 가을 하늘.

고려 청자는 한국의 가을 하늘과 한국인의 영혼을 담아둔 그릇이다. 신비(神秘) 무한의 우주가 담겨 있다.

청자엔 국화와 학의 그림이 곧잘 눈에 띈다. 청자의 국화문(菊花紋)은 하늘에 받치는 꽃 공양일 뿐 아니라, 무한의 우주에 피워놓은 영원의 꽃이다. 도공들은 국화꽃 향기 은은한 가을 하늘을 빚어놓고 싶었던 것이다. 망망한 그리움을 주는 하늘에다 학을 띄워놓은 것은 한국인의 마음이 영원의 세계와 닿아 있음을 뜻한다.

한국의 가을 하늘이 끝없이 열려 있는 고려 청자`─`세상에서 가장 맑은 하늘을 가진 겨레만이 빚을 수 있는 불가사의한 공예품이다. 고려 청자는 고려의 마음과 하늘의 신비가 어우러져 청아, 고결, 유현의 심오한 빛깔을 지녔다. 하늘의 비색(秘色)과 명상이 담겨 있다. 영원의 빛깔과 님의 눈매처럼 그윽한 선(線)이 하늘까지 뻗치고 있다.

세계 도자기 사상(史上) 처음으로 계발된 상감기법은 고려인의 예술적 자질을 보여 준다. 상감기법은 도자기 표면에 칼로서 나타내고자 하는 문양을 파낸 다음, 여기에 백토라든지 다른 재료를 채워 넣어 유약을 칠하고 나서 구워내는 기법이다. 새로운 미의 창조를 위해 자신의 몸을 도려내는 아픔과 상처를 감소하면서 다른 세계를 받아들이는 극한의 미의식이 깃들어 있다.

가을 하늘과 국화, 가을 하늘과 학 ─ 상감청자는 자신의 마음을 비워 다른 세계와의 영혼 교감으로 얻은 신비 세계가 아닐까. 그 속엔 포용과 조화의 미가 숨쉬고 있다.

중국 청자는 색이 진하고 유약이 불투명하여 예리하면서도 장중하다. 고려 청자는 은은하면서도 맑고 명랑한 비색, 유려한 형태미, 살아 숨쉬는 듯한 상감 문양, 여기에다 시적(詩的) 여유와 운치를 살리고 있다.

고려 청자는 우리 민족의 영혼을 꽃피워 담아놓은 그릇이 아닐 수 없다.

 

조선 백자(白瓷)

조선 백자는 우리 나라 가을 달밤을 담아놓은 영원의 그릇이다. 맑고 깨끗한 성정(性情)을 지닌 우리 겨레는 얼룩 한 점 묻지 않는 가을 하늘과 달밤을 통해 마음의 문을 열었다. 달밤은 우리 겨레의 한(恨)과 슬픔을 달래주는 부드러운 손길이었고, 님과 마음의 대화를 나눌 수 있게 하는 매체였다.

눈부시지 않지만 맑고 은은하게 마음마저 비춰질 듯한 달밤의 투명한 세계를 담아놓은 그릇 ─ 창호지 방문에 달빛이 물들고 벌레 소리가 들릴 때 사방탁자 위에 놓여진 백자 항아리를 바라보며 달을 떠올렸을 것이다.

서울의 간송(澗松) 미술관엔 ‘삼채대병(三彩大甁)’이라 불리는 청화백자가 있다. 이 백자엔 국화, 난초, 풀벌레가 그려져 있다. 18세기 초 영조 때 만들어진 이 백자엔 너무 맑고 고요로워 마음이 부시기조차 한 달빛이 내려와 있었다.

백자의 빛깔엔 달빛의 명상과 고요가 담겨 있다. 그냥 하나의 빛깔 바탕이 아니라 지상과 하늘을 이어주는 영원의 빛깔을 마음 속에 맞아들이고자 했다. 삶의 속기를 닦아주고 영원의 세계에 닿고자 하는 깨달음의 빛깔이다.

삼채대병의 곡선은 조금도 기울지 않는 보름달의 곡선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완벽하고 완전한 선형(線形)을 지니고 있어서 아무리 바라보아도 그리움이 넘칠 뿐 싫증이 나지 않는다. 그런데다 난초가 뻗어나간 곡선과 백자가 지닌 곡선이 한데 어울려 달과 난초가 시공 중에 생명률(生命律)로 만나고 있다.

님 없이 혼자 보기 아까운 달밤에, 그리움의 향기일듯 국화가 피어 있었다. 국화 곁에서 풀벌레 소리가 청아롭게 울리고 있었다. 삼채대병에 풀벌레를 그려놓았던 것은 백자가 달밤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조선인들이 백자를 사랑했던 것은 달빛처럼 정결하고 깨끗한 삶을 살아가길 바랬던 까닭이다. 백자는 영원히 하늘에 떠 있는 달이었고, 그 빛깔은 우리 삶의 시름을 닦아주던 달빛이었다.

조선 백자는 깨끗하고 담백한 달빛 미학을 창출하여 세상에서 찾을 수 없는 유현한 선미(禪味)와 독자적 세계를 꽃피운 민족 예술의 보물이다.

 

막사발

‘이토차완(井戶茶碗)’은 옛날부터 일본의 차인과 애도가(愛陶家), 무인들까지 마음을 사로잡은 명품으로 알려져 있다.

이토차완은 임진왜란 때 조선 경상도 지방에서 건너간 이른바 ‘막사발’이라 속칭하던 분청사기의 일종이다. 일본 차인들은 처음에 중국의 도자기를 차 그릇으로 선택하였으나, 우리 막사발을 본 후부터 중국의 도자기를 멀리 하고 말았다. 우리 막사발은 보기에도 부엌데기처럼 치장이나 장식적인 의식이라곤 찾아볼 수 없고, 담담하고 소박하기 이를 데가 없다. 멋부림도 없고 남에게 애써 잘보이려는 마음도 없어 보인다. 형식도 조형성도 생각하지 않고 마음대로 빚어놓은 생활 자기일 따름이다. 이 무의도성과 무형식성에 담겨진 심오하고 초연한 미의식은 막사발에서만 발견되는 세계이다.

섬세하고 정교한 미의식을 추구하는 일본인들은 거무튀튀하고 칙칙한 듯 아무렇게나 주물러 빚어놓은 막사발에서 상상하기도 힘든 개성과 마음의 경지를 느꼈다. 고단한 농사일에서 잠시 벗어나 막걸리를 한 사발 들이키고 밭두렁에 누워서 한가롭게 둥둥 떠가는 구름을 바라보는 농사꾼의 심정으로 빚은 그릇이다. 아껴야 할 마음도 없이 빈 마음으로 빚어낸 것이기에, 서민들이 사용해 온 그릇이요, 어쩌다가 개 밥그릇으로 쓰여도 그만이었다.

막사발은 일체의 형식이나 미의식을 초월해 버린 자유스러움과 마음의 경지에서 뜻밖의 새로운 미를 얻게 된 것이 아닐까.

‘꽃은 꽃을 버려야 열매가 되고, 강은 강을 버려야 바다에 이른다’는 화엄경의 말처럼, 아름다움은 아름다움을 버려야 진정한 미의 경지에 이를 수 있는 게 아닐까.

막사발에선 치장, 격식, 욕심을 벗어버린 천진 순박한 삶과 마음이 숨쉬고 있다. 깨달음의 미학과 인생의 새 경지가 보인다. 막사발은 조선 서민들의 소박한 마음을 꾸밈없이 담아놓은 그릇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