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旅行) 이야기

                                                                                                李應百

 나는 여행을 좋아한다. 국내로는 가족 또는 학생들과 수학여행차 경주며 부여, 설악산, 가야산 그리고 제주를 꽤 여러 번 갔다.

4·19가 난 해(1960) 경기도 학무국(學務局) 주선으로 수강생들의 편의 도모를 위해 그해 여름방학에 교육학에 한제영(韓悌泳), 음악에 김공선(金公善) 씨와 함께, 그때만 하더라도 좀체로 가기 어려웠던 백령도(白翎島)를 배로 반일(半日)이나 걸려 들어가 열흘 동안 유하면서 초·중등 교사들에게 국어 교육 관계 강의를 했던 것이다. 섬 둘레를 쫙 둘러싼 마치 계란같이 생긴 크고 작은 새하얀 규석(硅石)이 눈부셨다. 선착장 모래톱에 비행기나 헬리콥터가 그대로 이착륙을 할 수 있는 우리 나라에 몇 군데 안 되는 천연 활주로도 인상적이다.

해외로는 일본을 비롯하여 동남아, 하와이와 알래스카를 포함한 미국 그리고 유럽의 영국, 독일, 프랑스, 이태리, 스페인, 네덜란드는 물론 인도네시아, 호주, 뉴질랜드, 피지 등 바닷물이 푸르고 공기가 맑은 대양주(大洋洲)도 다녀왔다.

1978년 겨울에는 인도 뉴델리에서 열린 국제통신교육협회(ICCE) 제4차 대회에 공적으로 참가했을 때, 당시 인도 대사로 있던 서범석(徐範錫) 씨가 우리를 네 차례나 초대했던 것도 고마웠거니와 세계적 불가사의의 타지마할 묘궁(廟宮) 관광 귀로에 규모 큰 휴게시설에서 백 명이 훨씬 넘는 참가객 일행 속에 단 두 사람인 우리를 위해 세 번째로 아리랑을 연주해, 고마움을 표시했던 감격도 잊혀지지 않는다. 그 뒤로도 인도와 네팔, 스리랑카의 불교 성지 순례를 하고, 중국의 계림(桂林)이며 서안(西安), 북경, 만리장성, 심양, 연변(延邊)을 거쳐 백두산 등반을 두 번에 세 차례나 시도했으나, 비와 안개로 굳게 닫힌 천지(天池)가 얼굴을 드러내지 않은 것은 유감스러웠다.

1991년 7월 하순에서 8월 초에 러시아가 아직 소련일 때, 모스크바 국립사대에서 열린 제3차 이중언어학회(二重言語學會)에 참석 발표하고 알마아타, 타슈켄트를 순방했는데 그때까지는 대개 부부 동반이었다.

1994년 5월 중순, 그 전해 10월에 세상을 뜬 집사람과 생존시 같이 가기로 했던 남미의 파라과이, 아르헨티나, 브라질 사진을 가슴에 보듬어 안고 약 2주일 넘게 돌면서, 그곳 재외 동포와 그 자녀들에게 ‘한국어, 한국의 전통문화’에 대한 강연과 강의를 했고, ‘孝悌忠信’을 요구하는 대로 큰 붓글씨로 써 주었던 것이 기억에 새롭다.

중동이며 아프리카를 빼고 거의 전 세계를 돌아보았으나 산수가 우리 나라처럼 수려하고 오밀조밀 잘 짜여 있는 데도 없었다.

그래 이번에는 목표지를 국내로 돌려 우선 섬 나들이로 울릉도며 거제도의 해금강과 외도(外島), 다도해의 청도(靑島), 백도(白島)며 서해의 흑산도, 홍도(紅島)를 고루 돌고, 다시 남으로 방향을 바꾸어 완도의 장보고(張保皐) 청해진 유적, 보길도(甫吉島)의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의 유적, 진도의 바다 갈라짐 등도 목격했다.

그런데 올 들어 2월 하순에 느닷없이 밤중에 눈이 캄캄해지고 삼키지 못하며 딸꾹질이 열흘이나 계속되어, 콧줄을 통해 주사기로 미음을 섭취하는 병원 신세로 금족(禁足)을 당했는데, 그래도 아직 쓸모가 있고 해야 할 일이 남아서인지 19일 만에 퇴원을 하고 사람들 앞에 다시 서게 되었다.

그런데 1989년에 창립하고 계속 마음 써온 시조(時調) 단체에서 금강산에 갈 기회가 생겼다며 동도(同途) 권유를 해 왔다.

실은 내가 다닌 경성사범(京城師範)에서는 재학 7년 동안 매년 여행 계획이 서 있어 3학년에 금강산이 들어 있었는데, 1학년 때 인천의 월미도와 소사(素砂)의 염전 견학이 고작이고, 전쟁 핑계로 나머지는 몽땅 취소돼 버렸다. 금강산! 중국 사람도 ‘원생고려국, 일견금강산(願生高麗國, 一見金剛山)’ 했다는 천하의 절경 금강산 관광, 더구나 어느 큰 단체에 어울리긴 하면서도 10여 명의 뜻을 같이 하는 동반(同伴)이 있어 마음이 솔깃하였다. 그러나 퇴원한지 불과 몇 달 안 되는 건강이 조심스러워 섣불리 단안을 내리지 못하고 몸을 시험하기도 했다.

그 첫번째로 4월 17일(土) 만리포 옆 천리포(千里浦) 수목원행을 했다. 더구나 거기에는 미국인으로서 한자에 관심과 조예가 깊어 일찍이 한국은행 조사부 근무 시절, 내가 회장으로 있던 한국국어교육연구회에서 발표한 인연이 있는 한국명 민병갈(閔丙t) 씨가 한국에 귀화해 필생의 사업으로 펼친 곳이라기에 반가운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18만 평 소유지 중 1만 5천 평에 세계의 식물 6,500종을 심어 기른다. 특히 목련에 애착이 커 눈에 띄는 대로 모아 심어 살린 것이 450종이나 된다고 한다. 바쁘게 지낸 하루였지만 공기가 좋아서였는지 조금도 피로를 느끼지 않았다. 다음은 5월 14일 2박 3일 일정으로 경주 불교미술대전  ─ 국립공원 한려수도 선상 관광 ─ 지리산 청학동 서당 방문 ─ 무주 적상산의 적상호(赤裳湖)와 안국사를 돌아보고 16일에 거뜬히 귀경한 것이다. 그래 소신(所信)이 서 다음 날 금강산행 신청을 했다.

6월 5일 동해시에서 6시 25분 금강호를 타고 다음날 새벽 6시에 장전항(長箭港)에 닿았다. 사진 촬영 금지. 9시 모선(母船)에서 그보다 조금 작은 배로 옮겨 타 상륙, 세관 절차를 밟고 버스로 20분 걸려 온정리(溫井里) 착, 이곳은 ‘泰山이 높다 하되’로 시작되는 시조를 지은 조선조 선조 때 양사언(楊士彦)의 태생지란다. 담배는 재떨이 표지가 부착된 곳에서 옹기종기 모여서 피게 돼 있다.

우리는 안개에 싸인 구룡폭포(九龍瀑布) 코스를 향해 버스로 주차장까지 다시 가 위생실과 재떨이 시설만 있는 휴게소에서 20명씩 짜여진 조별로 조장(組長)의 3각 깃발을 따라 걷는다. 담배꽁초, 휴지나 비닐 조각, 깡통, 유리병 같은 것이 전연 없고, 물은 옥수(玉水)처럼 맑다. 옛날의 큼직하고 흠이 깊숙하게 돌에 한자로 새긴 성명의 획의 서슬이 오랜 비바람에 둥글려진 채 길 옆에 자연스레 펼쳐진 돌길을 그냥 걸어간다. 상팔담(上八潭)으로 향한 축도 있으나 나는 그냥 구룡폭포쪽으로 갔다. 길이가 74m에 폭이 4m라지만 흰 깁을 늘여 조용히 펼쳐 내린 느낌이 든다. 오른쪽 바위 밑자락에 선인(先人)들이 유난히 크게 새긴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의 끝 자의 오른쪽 내려 그은 획이 유난히 길다.

다음 날은 쾌청한 만물상(萬物相) 코스다. 온정리서 주차장까지 몇 굽이를 버스로 길게 길게 에돌아 올라간다. 이 길을 송강(松江)은 어떻게 올라갔을까. 물은 마찬가지로 깨끗하다. 동물보다 더 어질러 놓는 인간의 본성을 벌금으로 봉쇄한 것이다. 올라갈 수 있는 데까지 오르다가 병풍처럼 둘러쳐 있는 바위들을 멀리 치어다보고 울긋불긋하게 구불구불 이어진 행렬을 뒤로 삼선암(三仙岩)까지 되짚어 내려왔다. 깎아지른 계단을 올라간 삼선암 중턱, 뒤의 높이 펼쳐진 만불상이 그림처럼 잡힌다. 그것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시커멓게 치솟은 귀면암(鬼面岩)도 찰카닥.

느낌을 말로도 탄성으로도 발할 수 없고, 더구나 2, 3시간 등산의 생리 현상도 자체 처리하는 준비를 갖춘 수도 행각이 아닌, 돈 쓰고 희희낙락한 세속적인 관광은 아예 염두에도 둘 것이 아니다. 하늘이 빚어 주신 그대로의 영상(影像)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바위에 길고 크게 한글로 붉게 새겨 놓은 것은 예외) 그것을 우리에게만 통조림 코스로 열어놓은 제한성 앞에서 오로지 잠잠하고 숙연함을 가눌 자세가 필요하다.

3박 4일 일정을 마치고 금강호에서 내려 동해시에 한 발짝을 내딛는 순간, 후유 하고 긴 한숨이 내뿜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