뫼루소형

                                                                                           최병호

 ㄱ은 엉뚱한 짓을 잘한다. 무엇이든 재빨리 진수를 파악하고 간명하게 정리하는 재간이 툭툭 튄다. 정곡을 찌르는 무엇인가가 그 속에는 항상 도사리고 있는 것 같아 귀가 쫑긋해진다. 무모하리 만큼 몰아대는 대담한 실천력이 또한 손에 땀을 쥐게 한다.

횡단보도 앞에서의 일이다. 함께 푸른 신호를 기다리고 있는데 그는 느닷없이 불만을 토해냈다. “교통정리라는 게 뭐야. 뒤얽힘, 막힘을 원활히 풀자는 것 아냐. 그런데 개 한 마리도 얼씬거리지 않는 텅 빈 길을 앞에 두고 멍하니 신호 떨어지기를 기다린다는 것은 정말 일급 코미디야, 코미디. 아니 심각한 인권 문제이기도 하지, 안 그래. 넌 어찌 생각해?” 하곤 잽싸게 걸어 나갔다.

ㄱ은 나를 만나면 이런 유의 언동을 꺼림없이 해댄다. 그는 언젠가 자신은 돈키호테형이고 나는 햄릿형이라고 단정한 일이 있다. 당시 나는 두 작품을 다 읽고는 있었지만 그 뜻을 깊이 헤아릴 수준은 아니었다. 그런데 ㄱ은 놀랍게도 ‘형(型)’ 자까지 붙여가며 어쩌고 저쩌고 해대니 정말 기가 질렸다. 그러면서도 그 말이 싫지 않았다. 저돌적이고 무모한 돈키호테보다는 회의적이고 사색적인 햄릿이 훨씬 품위 있고 고상한 것 같아서다.

나를 주눅들게 했던 이같은 적용이 사실은 ㄱ의 창안이 아니라 투르게네프의 말임을 알게 된 것은 한참 후의 일이다. 투르게네프는 ‘햄릿과 돈키호테’라는 강론을 통해서 햄릿은 생각만 하고 돈키호테는 행동만 하는 인간이라고 했다. 햄릿은 선도 악도 믿지 않고 오로지 회의와 사색에 빠진 반면 돈키호테는 악에 짓눌린 민중을 위해 싸운답시고 유용한 풍차를 쳐부수는 따위, 저돌적인 행동성에 빠진 유형임을 지적했다. 비극의 씨앗은 양편에 다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투르게네프는 회의보다는 행동의 우위(優位), 우선(優先)을 분명히 했다. 행동하기 위하여 의지도 사상도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투르게네프는 이 강론 이태 뒤인 1862년, 돈키호테의 행동주의 사상과 맥을 같이 하는 소설 『아버지와 아들』을 내놓았다. 그는 주인공 바잘로프를 통해서 행동의 사상을 허무주의로 표현하고, 합리론 신봉자들이 냉철한 이성으로 만들어낸 어떤 제도나 법칙도 그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아이러니나 반어적인 말을 곧잘 해도 거짓말이나 변명, 회피, 위선, 허영, 타협 따위는 아예 타기했다. 투르게네프는 차가운 사상보다는 피가 도는 실천으로 구체적인 현실을 바로잡고자 한 행동주의 작가였다.

이런 배경을 일별하고 났을 때, 돈키호테형으로 자처했던 ㄱ의 그 재빠른 판단력이나 대담한 실천력은 결코 경망이나 무모로 치부될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설사 그런 면이 좀 짙었다 해도 그것은 기존의 잣대로 잰 결과일 뿐, 사실은 그게 오히려 진실하게 사는 인간의 참 모습이 아니던가.

햄릿형으로 불렸던 나는 마냥 부끄럽기만 했다. 천지도 모르고 내심 흐믓해서 그 틀에 자신을 맞추려고 제법 회의에 잠긴 듯, 선택의 고민에 빠진 듯, 사유의 논리에 골몰한 듯 당찮은 폼을 쟀으니 백 번 낯을 붉혀도 시원찮을 일이다. 이후 나는 한번도 무슨 형 운운하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한참 실존주의 얘기가 무성했던 시절, 어느 날인가 ㄱ은 불쑥 카뮈의 『이방인』을 내밀었다. 숨돌릴 사이도 없이 “주인공이 꼭 너 같애. 그래, 넌 햄릿형이 아니라 바로 뫼루소, 뫼루소형이야” 하고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나는 순간 불쾌감 같은 어지러움을 잠시 추슬려야 했다. 그렇지만 이내 따라 웃었다.

나더러 뫼루소형이라고?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그 마지막 얼굴도 보려 하지 않고, 눈물도 흘리지 않으며, 시신 앞에서 담배를 피우고, 잠을 자고, 밀크커피를 마시고, 장례 후 무덤 앞에서 묵념도 안하고, 또 이튿날 바로 해수욕을 하고, 여자와 놀고, 영화구경을 하는 따위, 그런 매정하고 부도덕한 뫼루소 같은 인간형이라고?

글쎄… 그저 해본 말이겠거니 하면서도 어쩐지 꺼림칙했다. 그러다가 문득 내가 상주 노릇을 했던 지난일들이 생각났다. 그래, 그럴지도 모르지. 그때 나도 허식적인 의례나 관행에 내심 얼마나 반발했던가. 간편한 현대식 상례에 따른다 하면서도 탈상까지 가슴에 꼭 달아야 한다는 상장은 보는 이에게 공연한 번잡을 준다는 구실로 끝내 생략하지 않았던가. 따져보면 불효하기는 그나 나나 오십 보 백 보다.

그러나 뫼루소가 사람을 죽이고 사형당하기까지의 과정은 나와 무연한 얘기다. 살의(殺意) 여부를 묻는 재판장에게 죽일 생각은 추호도 없었지만 햇빛 때문이었다고 대답하는 뫼루소, 신부의 면회를 거절하고 어떤 도움도 청하지 않는 뫼루소, 다가올 죽음에 대한 명철한 의식으로 무관심에의 문을 열고 세계와 자기가 하나되는 행복감에 젖어 자기의 사형집행을 많은 구경꾼들이 함성으로 맞아주기를 바라는 뫼루소, 어찌 내가 그런 알 수 없는 이방인이 될 수 있겠는가. 뫼루소형? 당찮은 얘기다.

만일 내가 그 경우를 당했다면 나는 즉각 변호사를 사고 그와 공모하여 온갖 논리를 내세워 그것이 정당방위라고 주장했을 것이다. 아니면 본의 아닌 실수라고 참회의 눈물을 뻘뻘 흘리며 동정을 구했을 것이다. 신부 따라 손을 모으고 성경 구절을 주저리주저리 외며 매달리다가 정 안 되면 천당의 문이라도 열어달라고 애원했을 것이다. 줄곧 죽음의 공포에 떨며 차라리 세계가 멈춰주기를 자랑스런 조상의 이름으로 빌고 또 빌었을 것이다.

사람을 죽여놓고 그 이유를 햇빛 운운하는 뫼루소의 답변은 아무래도 상식을 벗어난 무책임한 기행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카뮈는 이를 오히려 예수의 처지와 같다고 말한다. 아무런 기적도 베푼 일이 없는 뫼루소가 자신의 모든 행위를 끝내 설명하지 않고 예수처럼 사회의 이름으로 처형됐기 때문이다. 그런 그에게 진실성이 없다면 예수에게도 그게 없을 수 있다는 설명이다.(中村光夫, 『異邦人論』 참고) 엄청난 얘기다. 무슨 뜻일까?

이미 죽기를 작심한 뫼루소! 그는 사람이 사람을 죽였으니 당연히 죽어야 한다는 소박한 인간애를 실천하고 있다. 자기 행동은 자기가 끝까지 책임지는 참다운 윤리의식의 발로다. 그는 법정이라는 것을 믿지 않는다. 불완전한 법전을 놓고 불완전한 법조인들이 모여 발라 맞춘 머리 싸움을 하는 곳이 바로 법정이 아니던가. 그리하여 뫼루소는 판결 이전에 이미 다가오는 죽음의 명증을 기꺼이 의식하면서 요식 행위로 그냥 햇빛 운운하고 만 것이다. 그것은 사실 햇빛이 아니라 바람 소리면 어떻고 파도 소리면 어떤가. 그러나 그것은 거짓말이나 변명이 아니다. 일종의 아이러니다. 마치 일제 때 우리 독립투사들이 법정에 끌려나와 오직 독립투쟁의 사실만을 떳떳이 주장하고 그 밖의 것은 어떤 것도 인정하지 않았던 의연함과 흡사하다. 뫼루소의 죽음을 예수의 죽음 이상의 진실로 풀이한 것은 바로 이같은 인간 위주의 현실을 보다 중시한 탓이다.

이렇게 따지고 보면 뫼루소는 햄릿과 맥이 닿은 게 아니라 돈키호테에 이어진 행동적 인간형이 아닌가. 그렇다면 ㄱ과 나는 같은 유형이 되는가? 지난날 서로 돕고 겨루며 주고받았던, 이 대단찮은 사연들을 이렇듯 간추리고 보니 ㄱ과 나는 어쩔 수 없는 친구 사이다. 그러나 아무리 제 행동을 제가 책임진다 해도 과연 이 세상에 뫼루소처럼 그것을 위하여 기꺼이 죽음과 랑데부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뫼루소형? 얼굴이 확확거린다. 아무래도 ㄱ을 찾아 시원한 약주라도 몇 잔 나눠야 할 것 같다. 그런 정회가 붕긋이 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