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설문지

                                                                                            윤숙경

 그날 밤, 일본 교토(京都)의 로얄호텔 연회장에는 ‘99 진주회경도대회(晋州會京都大會)’라고 쓴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그리고 좌석에는 한국에서 간 우리 일행의 이름표가 놓여져 있었다. 백여 명이나 되는 회원들은 태반이 백발 노인들이어서 칠십을 바라보는 우리가 오히려 젊은 편이었는데, 그도 그럴 것이 해방 전에 진주에서 살았던 일본 사람들 중에서 소학교 동창들이 주동이 되어 모임을 가졌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들 중에는 우리와 같은 여학교에 다니던 동창들과 선생님도 몇 분 계셨다. 대회를 진행하면서 올해부터는 진주시와 교토시가 새로운 형태의 ‘파트너 시티’로 체결되었으니 앞으로 두 시(市)가 학술, 교육, 문화의 교류는 물론 한일 친선에 더욱 이바지하기를 기원한다고 했다. 너무나 오랜 세월을 못 만났던 사이고 보니 마음은 반세기의 시공을 뛰어넘어 옛날로 돌아간 듯했고, 들뜬 분위기는 가라앉을 줄 몰랐다.

그들 중의 몇 명이 ‘아리랑’과 ‘도라지타령’을 부르니까 모두들 손뼉을 치며 같이 흥겹게 따라 불렀다. 또 ‘진주라 천리길을 내 어이 왔던가’를 애절하게 부르고 있는 모습을 보니 여기가 한국인지 일본인지를 알 수 없을 정도였고, 그들이 얼마나 진주를 그리워하고 있는 지를 알 수 있었다. 그때 노인 한 분이 내 옆으로 다가왔다.

우리 집 건너편에 있던 이시이(石井) 병원집 아들이라고 자기 소개를 하면서 옆자리에 앉았다. 나는 먼저 그의 아버지 안부부터 물었고, 그는 나의 어머니가 살아 계시는가를 궁금해 했지만 두 분 다 고인이 되신 지 오래된 현실 앞에서 서로 옛날 일만 떠올리고 있었다.

우리 집 식구들은 그 병원을 자주 드나들었다. 어머니는 병으로 아들 하나를 잃으신 뒤에 지금의 남동생을 낳으셨다. 동생의 이마가 조금만 뜨거워도 그 병원으로 달려가시고, 칭얼거리기만 해도 그 의사에게 업고 가시던 모습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어머니에게는 그 병원 의사가 수호신처럼 의지가 되셨던 분이라서 색다른 음식이 있거나 햇과일이 나오면 그 집부터 가지고 가셨다. 나도 그 병원 석조 건물 이층 창가에 가지 무성하게 뻗어 올라간 돌 담쟁이가 좋고, 정원에는 나무와 꽃이 많아 아프지 않으면서도 자주 그 병원에 들어가 서성거리곤 했다. 얼굴이 갸름하고 키가 큰 의사가 항상 반갑게 맞아주어서 더 그랬는지도 모른다.

오늘 만난 그 병원집 아들은 말했다. 자기는 한국 소주를 좋아해서 자주 마시는데 술에는 강하지만 여자에게는 약하다고 슬쩍 농담도 해왔다. 이즈(伊豆) 반도에서 산부인과 병원을 하고 있으니 그쪽으로 여행할 기회가 있으면 꼭 한 번 놀러오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밤이 깊어가는 줄 모르고 무르익던 분위기는 그들이 다니던 소학교 교가를 합창하면서 끝이 났는데, 삼절까지의 가사를 아직도 기억하고 부르는 그들의 얼굴을 보니 모두 눈시울이 젖어 있는 것 같았다.

연회장을 나와 위층에 있는 숙소로 가려는데 누군가가 회원 명부와 함께 설문지 한 장씩을 나누어주었다.

그 설문지에는 ‘현재 칠백 명인 회원이 오십 명 이하로 줄었을 때 이 모임을 중지할 것인지, 아니면 지금부터라도 자손들을 참여시켜서 이 모임을 계속할 것인지’라는 문항이 들어 있었다.

유한한 우리 인생에 언젠가는 오고야 말 그날을 미리 마무리하자는 말로 들리면서 이 모임에 대한 그들의 애정과 진지함을 보는 듯했다.

그들은 패전을 맞아 쫓기다시피 일본으로 돌아갔다.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허탈과 혼미 속에서 파란만장한 세월을 보냈을 것이다. 그리고 고생고생 끝에 겨우 기반이 잡히고 심신의 상처가 아물기까지 근 삼십 년의 시간이 걸렸다. 어린 시절과 젊은날을 보낸 진주가 그리워도 참기만 하던 그들이 드디어 ‘진주회’를 만들어 서로 진주 이야기를 나누며 회포를 풀고, 서로 소식을 전하면서 한마음이 되었다. 이 모임은 지금부터 이십팔 년 전부터 시작한 모임이라고 한다. 북해도에서부터 남쪽의 가고시마까지 국내 비행기로도 두 시간이 넘게 걸리는 거리도 아랑곳하지 않고 매년 장소를 바꾸어가면서 만날 뿐만 아니라 몇 년에 한 번씩은 꼭 진주에서 이 모임을 가졌다.

역사란 무엇일까. 그리고 그들은 과연 누구였던가. 그들의 식민지 정책 아래서 우리는 얼마나 만신창이가 되고 어두운 세월을 보냈던가. 그러나 강물이 끝없이 흘러가듯 모든 것은 흐른다. 세월이 흐르고 역사가 흐르고 미움도 사랑도 흐른다. 우리 인생도 흘러 언젠가는 생을 마감하는 날이 오면 모두가 태어났던 곳으로 돌아갈 것이 아니던가. 흙으로 바람으로 안개로…….

황혼길에 서 있는 그들이 다시 만날 날이 몇 번이나 더 있을지. 어쩌면 이번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진주에서의 추억이나 그리움도 함께 묻어야 하기에 더욱 애절한 감상에 젖어 있는지도 모른다.

가는 세월은 어쩔 수 없다. 해마다 줄어가는 회원은 언젠가는 염려한 대로 오십 명 이하로 줄어들 테고, 마침내는 아무도 남지 않게 될 날이 올 것이다. 달빛 부서지는 남강 물을 보면서, 서장대(西蔣臺)를 휘감고 넘어가던 현란한 저녁 노을을 보면서 자라난 그들의 감회(感懷)를 어느 자손이 짐작이나 할 것이며, 잃어버린 그 세월을 되돌려 줄 것인가. 어쩌면 그들이 가장 그리워하고 있는 것은 진주가 아니라 그곳에서 보낸 사춘기와 젊은날의 세월일지도 모른다.

 

윤숙경

수필공원으로 등단.

공저 『마루가 있는 집』, 『서호로 가자스라』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