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초회 추천-

 칠선(七仙)골 가는 길

                                                                                                          윤삼만

 밤늦은 시간에 ‘따르릉 따르릉’ 전화가 울렸다. 돌구름[石雲]이었다. “얼굴이나 한 번 보자”, “언제?”, “아천(阿泉)하고 여주(如洲)하고 넷이 지리산에 가서 바람이나 쐬자. 차는 내가 몰고 갈게.”

그러자고 했다. 네 사람이 이웃 학교에서 근무할 때는 자주 만났었는데 퇴임 후로는 뭘하는지 삼 년이 가깝도록 만나지 못했다.

이른 아침 등산복 차림으로 경남 문화예술회관 마당에 모였다. 모두 머리카락이 희끗희끗하다. 나이는 조금 굽어 보이나 구릿빛 얼굴에 눈빛은 여전히 맑고 생기가 있다. “머리가 왜 그리 셌어?”, “육십이 꽃이라는데, 이만큼 생기가 있으면 됐지.”

고희를 넘긴 아천이 여주를 보며 웃는다.

도심을 빠져 산청(山淸) 가는 길로 접어들었다. 새로 포장한 사차선 길이 확 트인다. 아침 햇살을 등지고 차는 시원하게 달린다. 차창 바람에 상쾌하다. 빈 무논이 띄어띄엄 있지만, 일찍 심은 벼는 땅내를 맡아 푸른 잎이 시원한 바람에 나부낀다. 물꼬를 보는 농부는 괭이 자루에 몸을 기대고 서서 싱그런 아침 햇살이 춤추는 푸른 들판을 바라보고 있다.

농부는 이른 봄 못자리를 다듬어 모판에 볍씨를 뿌린다. ‘모 농사는 반 농사’라며 정성껏 가꾼다. 모가 크면 모내기를 한다. 모내기를 하고 나서 물꼬를 아침저녁으로 돌본다. 물이 많으면 빼고 적으면 대어 준다. 가물 때는 지하수를 뽑아올린다. 못 물을 끌어 대다가 물싸움을 하는 등 야단을 떤다. 거름도 주고 피나 잡초도 뽑아 준다. 초벌, 두벌의 김매기는 볏잎이 작고 부드러워서 손쉬우나 세벌은 복(伏)더위에 구슬땀이 흐르고, 억센 볏잎은 살갗을 벌겋게 할퀸다. 비료도 주고 농약도 뿌려 병충해를 막는다. 저 농부의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벼는 자랄 것이다.

핸들을 잡은 돌구름이 문득 한 마디 한다. “흙은 거짓말 안하지”, “그럼, 순리대로 살잖아.” 내가 말했다. 차는 생림휴게소에 들어갔다. 자판기의 커피를 한 잔씩 뽑아 들었다. 신선한 공기와 함께 마시는 아침 커피의 향기는 더 상큼하다. 커피 잔을 들고 여기저기 둘러본다. 사철나무 울타리를 한 주차장 바닥은 보도블록이 깔렸다. 질경이와 이름 모를 잡초가 보도블록 틈새를 비집고 나와 있다.

질경이 씨는 바람결을 타고 퍼진다. 어디에고 떨어져서 흙가루와 먼지를 덮고 살아난다. 살기 좋은 곳도 많은 데 하필이면 주차장 틈새에 자리잡다니, 참 얄궂은 운명이다. 질경이는 겨울의 눈보라, 찬 서릿발에도 몸을 웅크리고 참는다. 개나리꽃 내음을 맡으며 고개를 내밀다가 찬바람을 맞는다. 뿌리를 내리고 잎새를 펴면 그때는 염소에게 뜯긴다. 오가는 길손들의 발자국 소리에 귀가 쭈뼛쭈뼛 선다. 어린이가 덮칠 때는 그래도 참을 만하다. 어른에게 밟힐 때는 폭삭 쭈그러지고 피가 난다. 하소연할 곳이 없어 그 고통을 혼자 삼킨다. 가뭄에는 목이 탄다. 목 마르다고 외쳐봐도 소용이 없다. 태풍이 몰아칠 때는 몸이 휩쓸려갈 것 같고, 내리 덮칠 때는 등이 부러지고 숨이 막힌다. 그래도 가을엔 이삭꽃이 피고 씨가 영근다. 뉘 하나 반겨주는 이 없어도 질경이는 굳건히 그 일을 해낸다. 노란 은행잎이 한 잎 두 잎 떨어질 때 씨는 어디론가 흩어져가고 민머리만 남는다. 그리고 겨울을 맞는다.

주차장을 싸고 있는 사철나무 울타리 밖은 배밭이었다. 배나무를 손질하는 농부가 보였다. 종이 잔을 휴지통에 넣은 여주가 배밭엘 간다. 다들 따라간다. 배나무들은 줄을 짓고 늘어섰다. 나무마다 쭉 뻗은 큰 가지가 네 개씩이다. 농부는 이쪽 가지와 저쪽 가지를 휘어잡아 터널을 만들고 있었다. 왜 그렇게 하느냐고 여주가 묻는다. 이렇게 해놓으면 우선 작업하기 좋고, 서로 지탱해 줌으로 강한 바람에도 잘 견딘다고 농부가 일러준다.

차는 왕산 기슭을 지나 함양(咸陽) 마천골로 빠져든다. 누가 5월을 계절의 여왕이라 했던가. 산은 푸르다 못해 새푸르다. 햇볕에 따라 펼쳐지는 초록 무늬가 마치 물결치는 푸른 융단 같다. 잎새마다 뒤질세라 발꿈치를 치켜들고 얼굴을 내민다. 곱게 단장한 얼굴엔 윤기가 흐른다.

마을 앞 느티나무 밑에 차를 세워두고 칠선(七仙)계곡으로 갔다. 해는 중천에 떴다. 갈수록 돌 많고 울퉁불퉁한 길바닥이다. “산 위에서 부는 바람 시원한 바람 그 바람은…” 돌구름이 목청을 뽑았다. 너나없이 큰 소리로 따라 부른다. 봄소풍 가는 아이 때처럼 시원한 바람이 메아리친다.

서너길 되는 하얀 폭포가 옹당으로 내려서며 앞을 막는다. 그 옆의 덕석만한 바위에 우리는 짐을 풀었다. 바위는 화문석 같다. 옹당이 물은 눈이 시리도록 깨끗하다. 크고 작은 바위를 에돌며 흘러나간다. 단풍나무가 팔을 쭉 뻗혀 일산으로 우리의 햇볕을 가려준다. 웃옷을 벗기가 바쁘게 손을 담갔다. “엇! 시원해, 엇! 시원해” 아이 적처럼 물장난을 쳐가며 땀을 식히고 바위에 둘러앉았다. 물, 바람 소리 맑고 하늘, 산 푸르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거늘…” 돌구름이 준비해 온 보자기를 푼다. 작은 술병 두 개가 나왔다. “어? 왠 소주?” 아천이 반긴다. 그러는 아천을 여주가 퉁을 준다. “사람이 이래 가지고서야”, “술은 서민이 마시면 소주고, 신선이 마시면 신선주지. 이건 신선주야, 신선주.” 돌구름이 두 홉들이 소주병을 흔들어 보인다. “그렇지, 어서 따라라 신선되어 보자.” 뚜껑을 따기도 전에 아천은 컵부터 내민다. “고시레~” 컵은 돌아가고 김밥은 논다.

여주가 풀잎을 물고 “피릴리~ 파릴리~” 소리를 내자 돌구름이 “청산리 벽계수야…” 황진이의 옛 시조를 한 수 뽑는다. 아천이 고수다. 장구 대신에 배를 두들겨 장단을 맞추고 나는 손뼉을 친다. “…쉬어 간들 어떠리” 구름 한 송이 낭랑하게 흘러간다. 나도 서툰 시 한 수를 읊는다. “綠樹濃陰滿繡天 白雲紋樣畵圖然 深山幽谷神仙戱 碧水溪流玉帶連.” 아천이 받는다. “푸른 나무 짙은 그늘 하늘 가득 수놓고, 흰구름 무늬는 그림 같구나. 깊은 산 그윽한 골에 신선이 노니는데, 계곡의 맑은 물은 옥대같이 흐른다”, “좋다!” 무릎을 친다.

셋은 어디로 가고 칠선이 놀았다는 옛 계곡에 오늘은 벗 넷이 노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