權老人

                                                                                          윤모촌

 열흘간의 입원중에 내가 권노인과 함께 지낸 것은 일주일간이다. 이제 시일이 흘러서 그 노인을 잊을 만큼도 되었는데 때때로 떠올라 뇌리에서 사라지질 않는다.

지난 봄에 2인 1실 병실에서 혼자 사흘 동안을 지내고 있는데, 그때에 권노인이 들어왔다. 키가 훤칠하고 기골이 장대한 그는 나를 보자, 동병상련의 심정에서였던지 말을 붙여왔다. 나는 그의 말을 받으면서 인간미가 사라져가는 때의 마지막 인간미 같은 것을 느꼈다. 권노인의 태도에는 그렇게 정중함과 예절바른 데가 있었는데, 처음에 나는 그가 청초한 인상이 아니어서 좋게 보지 않았던 터였다.

권노인은 나보다 여섯 살이 위인 83세이다. 한 여인이 보호자로 따라왔는데 연령으로 보아 아내 같지가 않았다. 그렇다고 딸 같지도 않았다. 짐작으로 권노인보다 20년쯤 아래인 듯싶었는데, 간호사가 부인이냐고 물었을 때, 대답을 선뜻 안했다. 권노인이 동거인(同居人)이라고 하자 그 말을 미처 못 알아들은 간호사가 되물었고, 세 사람 사이에 묘한 공기가 흘렀다. 내가 얼른 나서서 동거인이란 부인이란 뜻이라고 일러주었다.

내 눈치를 살폈던지 권노인은 어느 날 여인의 신상 얘기를 꺼냈다. 본부인은 병약해서 이미 60대부터 아내 구실을 못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권노인은 혈기가 왕성한 자신이 어쩌겠느냐면서, 부인의 양해를 얻어 지금의 여인과 만났다고 하였다. 그리고 여인의 인격적인 면을 들려주었다. 나는 권노인의 말에 재력이 있는 팔자 좋은 노인이구나 하였다. 그렇게 여겼던 까닭은 젊은 여인과 지낸다는 점도 있었거니와 권노인이 하는 전화를 듣고서였다. 그는 환자복으로 갈아 입고 침대에 눕자, 비서에게 하는 듯 통장 관리를 지시하였다.

나는 권노인과 며칠 동안을 지내는 사이에 그의 신상에 대해 거의 알 만큼을 알았다. 노인 스스로가 얘기를 들려주었기 때문인데, 입원 직전까지 그는 상당한 규모의 건설업 경영주였다. 혹독한 일제(日帝) 때에는 군수 산업체에 근무를 해서 징용을 면했다고도 했다. 이공계 일본 유학을 했다는 말을 듣고 나는 그가 그 계통의 기사인가보다 하였다.

많은 문병객은 아니었지만 권노인에게 방문객이 들락거렸다. 50대에서 30대까지의 자녀들이었지만, 은행 지점장에서 정년한 아들이라 하였고, 몇째 며느리 몇째 딸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기이하게 여긴 것은 그들 문병객들이 하나같이 내게 깎듯이 인사를 하는 일이었다. 나는 권노인의 문병객들이 왜 내게까지 인사를 하는가에 대해 생각하였다. 그러면서 지난날 할아버지가 하시던 말씀 ─ 사람은 인사성이 밝아야 한다는 말씀을 회상하였다.

권노인은 움직일 때마다 병원의 불친절을 말하였다. 간호사가 말버릇이 없다고 호통을 치곤 했는데, “할아버지 아팠어? 오늘은 어때?” 하면 왜 반말을 하느냐며 호령을 했다. 나는 애교 어린 말로 듣곤 했는데 권노인은 그것이 아니었다. 이렇게 그가 예절바른 이라는 것을 안 나는, 그 예절이 고풍에 젖은 외곬 노인의 습성이지 하면서도, 범접 못할 그 기상에, 우리에게서 무엇인가 잃어버린 것을 되찾는 듯하는 기분이었다. 나는 할아버지의 사랑방 분위기 같은 것이 회상되면서 권노인과 있는 동안 사라져간 것들이 다시 아쉬워지기도 하였다.

권노인은 전통 문화의 고장인 안동이 고향이다. 그는 고향 마을에 8대 명문(名門)의 종손(宗孫)들이 산다고 하였다. 나는 8대 명문을 말하는 것으로 보아 권노인이 어떤 사람이라는 것을 짐작하였다. 그는 황해도 규수와 연애 결혼을 했다고 했는데, 결혼이 이루어질 무렵 양가의 가문 때문에 난관에 부딪쳤다고 하였다. 자신의 가계는 안동 권씨 ─ 왕권 다툼의 희생이 돼 억울하게 죽은 단종의 외숙 직계인데, 아내의 가계는 한명회였다는 것. 권노인은 집안이 발칵 뒤집힌 상황에서 홀어머니인 어머니가 집안으로부터 받은 파혼의 압력을 상상해 보라고도 말하였다. 그러면서 8대 명문들의 비난과 조소를 받는 일이 더 감내하기가 어려웠다 한다.

나는 때마침 피로 얼룩진 왕조 사극 ‘왕(王)과 비(妃)’가 단종의 비극을 반영중이어서 안동 명문들의 권노인에 대한 파혼 압력을 짐작할 수 있었다. 나는 소설 같은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런 압력을 물리친 권노인의 사랑관에 또다른 면모를 보았다.

 

어느 날 발랄한 30대 중반의 여성이 다녀갔다. 역시 내게 인사를 깎듯이 했는데, 권노인은 막내딸이라고 하였다. 그 딸의 혼인이 정해졌을 때 사돈 쪽 사람이 와서 하는 말이, 예물단자의 품목 제시를 요구하더라는 것이다. 권노인은 잠시 뜸을 들이고 나더니 숨을 돌리고 나서 다시 말을 이었다. 사돈될 사람을 불러 앉히고 말하기를, 파혼으로 해서 비난을 받을지언정 예물을 요구하는 가문과는 혼인을 할 수 없다고 했다 한다. 권노인은 당시의 결연한 의지를 재연하면서 그런 집에 시집을 간 딸이 지금은 귀염받고 아주 잘 산다고 하였다. 나는 권노인의 말에 속이 후련하였다.

그런 권노인을 두고 나는 퇴원을 하였다. 반 년이 지난 지금 그의 소식이 궁금하다. 결벽증에 가까운 그의 윤리관에 답답하다는 심정마저 인다. 그를 따라와 보호를 하던 여인은 가족들이 올 때마다 눈인사조차 교환하지 않았다. 언제나 슬며시 병실을 나갔다가 가족들이 돌아간 다음에야 말없이 들어서곤 하였다. 1~2년도 아니고 수십 년을 살아오면서 자녀들에게 왜 그렇게까지 벽을 두게 했어야 한 것일까.

나는 권노인이 말한 부분을 또 짚어보았다. 그는 고향의 누대(累代) 산소를 돌아보고 가벼운 마음으로 입원을 했다고 한다. 그런 그가 동거 여인과 가족 사이에 왜 벽을 두게 했는가를 생각해 보았는데, 어쩌면 그것은 권노인 스스로가 가족 구성의 윤리를 벗어난 자책과 그렇게 한 자신의 생활을 자녀들에게 확인시키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었을까 한다.

나는 그런 그와 있는 동안 인간의 길이 무너져가는 세태 속에서 사라져가는 것들이 발하는 빛의 향수에 젖곤 하였다. 그리고 그가 쾌유되지 않아 어쩌면 타계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내 폐포(肺胞)의 한 부분이 꺼져간다는 느낌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