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물쇠와 열쇠

                                                                                             강호형

 자물쇠는 주인도 몰라본다. 열쇠가 없으면 주인도 침입자 취급을 한다. 워낙 침입자가 많은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이 현대인·도시인들이고 보면 누구나 자기 집, 자기 사무실 앞에서도 쫓겨난 신세가 되어 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자물쇠라는 것이 대개는 간단한 금속 장치에 불과하지만 천하를 호령하는 권력자 앞에서도 열쇠가 없으면 요지부동으로 말을 듣지 않는다.

그러나 그런 쇠붙이만 자물쇠는 아니다. 입장료가 부과되거나 보안상 출입이 통제된 공공장소에는 문지기가, 짝사랑하는 이성의 가슴에는 무관심도 완강한 자물쇠다. 비리에 연루되어 청문회장에 나왔던 어느 재벌 총수는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아(그는 아예 마스크를 하고 나왔었다) 자물쇠란 별명을 얻었는데, 그러고 보면 입도 훌륭한 자물쇠가 될 수 있는 모양이다.

포연이 채 가시지 않았던 50년대에 나는 무작정 상경한 10대 소년이었다. 폐허가 된 서울에서 고학을 하고 있었는데 그럴망정 소년은 소년, 폐허가 됐을지언정 서울은 역시 서울이었다. 한창 꿈 많고 호기심 많은 소년에게는 보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이 많았다. 그러나 서울은 내게 있어 숱한 보물을 감추고 있되 완강하게 잠긴 보고일 뿐, “열려라 참깨” 하면 열리는 알리바바의 동굴처럼 동화적인 곳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나는 겨울 벌판에 쫓겨난 아이처럼 괴롭고 외로웠다.

그 어느 해던가. 서울 운동장(지금의 동대문 운동장으로 당시에는 계단식 관람석에 어설픈 담장만 둘러쳐져 있었다)에 한·일 국가대표팀 축구 경기를 알리는 플래카드가 내걸렸다. 그러자 아이들은 온통 축구 얘기로 장안이 술렁거렸다.

마침내 결전의 날이 밝자 매표소 앞에는 표를 사려는 인파가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돈을 쥐고도 멱살잡이가 벌어지는 그 인파 속에 돈도 없는 내가 끼이게 된 것은 친구 덕이었다. 삼촌이 축구협회 간부라 공짜로 들어갈 수가 있다는 것이었다. 일행은 셋이었는데 삼촌을 빽으로 둔 친구가 우상처럼 우러러보였다. 민원 서류 한 장 떼는데도 빽이 있어야 한다던 나 같은 시골뜨기로서는 떠받들기를 잠시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할 우상임에 틀림이 없었다.

우리는 ‘우상’을 앞세우고 당당하게 입장 행렬에 섰다. 지루하게 행렬을 따라간 끝에 마침내 문지기 앞에 섰다. 그러나 우리의 우상은 우리를 크게 실망시켰다. 표 받는 사람과 뭐라고 몇 마디 주고받더니 얼굴이 벌겋게 상기된 채 맥없이 밀려오는 게 아닌가!

“안 된대.”

그도 멋쩍었던지 머리를 긁적이며 잔뜩 풀죽은 목소리로 뇌까렸다. 삼촌이 자기 이름만 대면 통과될 것이라고 했다는데 안 먹히더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거기서 포기하기는 너무나도 아깝고 억울했다. 그래서 혹시나 하고 삼촌을 찾아봤지만 허사였다. 그러는 사이에 표를 사지 못한 사람들의 성화에도 아랑곳없이 문마저 잠가버렸다.

그래도 미련을 버리지 못해 서성이는 동안 경기가 시작됐는지 안에서는 함성이 터져나왔다. 그럴수록 안에서 지금 어떤 장면이 연출되고 있는지 궁금해 견딜 수가 없었다. 우리는 그 날 무등을 타고 담장을 넘다가 잡혀 꿀밤만 한 대씩 얻어맞고 오는 길에 라디오 가게 앞에서 이광재 아나운서의 지나치게 애국적인 중계방송을 듣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랬다.

요즘은 음란물들이 청소년의 정서를 해친다고 야단들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50년대의 어른들도 같은 걱정을 했다. 요즘 와서 생각해 보면 별것도 아닌 영화도 당시에는 ‘입장 불가’ 딱지가 붙었었다. 그러나 못 보게 한다고 안 보는 것은 청소년이 아니다. 잠긴 문은 열어 보고 싶고, 가려진 곳은 들춰보고 싶은 것이 청소년을 청소년답게 하는 특성이다.

나도 그런 때가 있었다. 조조할인 시간대에 학교에서 단체로 관람하는 영화는 왜 그런지 시시한 것 같고, ‘학생 입장 불가’라야 뭔가 볼거리가 있을 것만 같아 도둑고양이처럼 기회를 엿보곤 했다. 산드라 디, 오드리 헵번의 그 깜찍하게 예쁜 용모에 가슴이 뛰고, 금방이라도 사내를 보리밭으로 유혹할 듯한 실바나 망가도의 도발적인 포즈에 정신이 혼미해지던 때도 있었다.

그 무렵의 어느 날, 역시 ‘…불가’ 딱지가 붙은 수도 극장에 잠입하는데 성공한 적이 있었다. ‘장미는 산에서 지다’란 영화였던 것은 분명한데 내용이 떠오르지 않은 것으로 보아 썩 좋은 영화는 아니었던 것 같다. 어쨌든 영화가 끝나고 나오려는데 입구에 들어갈 때는 없던 경찰 아저씨가 버티고 앉아 있는 게 아닌가. 순간 전에도 극장에서 잡혀 사흘 동안 반성문을 써다 바친 바 있는 훈육주임 선생님의 얼굴이 떠올라 질겁을 하고 돌아섰다.

재미없는 영화를 세 번 보는 것이 얼마나 고역인지를 나는 그 날 절실히 느꼈다. 마지막 회가 시작되고 나서야 극장을 벗어났는데 감옥에서 풀려난 기분이었다. ‘계율’이라는 자물쇠가 얼마나 견고한지를 깨달은 것도 그 날이었다.

그로부터 어느덧 반세기에 가까운 세월이 흘러 21세기의 문턱에 섰다. 그래서 지난 제야에는 장안이 떠들썩한 축제까지 벌였지만 44세기에 사는 후손들이 21세기라며 들떠 있는 모습을 단군할아버지가 보셨다면 크게 노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그 따위 실속없는 생각이나 하고 있었던 것이 잘못이었다. 새 시대는 ‘인터넷 소사이어티’ ─ 모든 세상살이가 사이버 공간 안에서 이루어진다는데, 내게는 그 공간이야말로 ‘알리바바의 동굴’이니 ‘열려라 참깨’가 21세기의 알리바바에게도 통할지가 걱정인 것이다. 집안에 컴퓨터를 들여놓고도 기종을 세 번이나 바꾸도록 나는 도무지 정나미라고는 없어 보이는 그 요술단지를 아는 체도 하지 않았으니 보복을 당해도 할 말이 없다. 이런 내 처지가 그 옛날 서울 운동장에서 쫓겨났듯 21세기에서 쫓겨난 것인지, 수도 극장에 갇혔듯이 20세기에 갇힌 것인지 그것부터 따져보고 열쇠를 만들든 주문을 외우든 무슨 대책을 세워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