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추벌레

                                                                                             윤근택

 고향에 들렀다. 올해는 고추벌레가 극성이란다. 형님 내외가 고추밭에 농약을 치러 간다기에 따라나섰다. 어릴 적부터 자주 보아 왔지만 세상에 이처럼 모진 녀석들은 없을 것이다. 이들 무리는 고추와 담배 특산지인 내 고향 사람들을 골탕먹인다. 애벌레는 고추잎, 담뱃잎은 말할 것도 없고 그 매운 고추 속까지 파먹어 들어간다. 고추에 구멍을 내면 빗물 따위가 들어가서 무름병을 일으키고 희나리 고추를 만들어 버린다. 그 작은 것들이 맵기로 유명한 청양 고추의 속까지 파먹어 들어가다니.

이젠 그 지독한 녀석들의 이름만이라도 알고 지내야겠다. 담배 판 돈, 고추 판 돈으로 대학까지 구경하였으니 해충학을 펴본다. 이들은 밤나방과에 속하는 담배나방, 파밤나방, 담배거세미나방이다. 습성은 비슷하다. 주로 고추와 담배를 해치나 토마토, 목화, 옥수수, 피망, 가지, 호박, 대마도 해친다. 어린 애벌레는 밤낮없이 갉아먹지만 커갈수록 밤에만 먹는 습성을 지녔다. 나방이 되었을 때는 황갈색의 날개를 갖는다. 번데기 상태로 땅속에서 겨울을 지낸 뒤 6월경부터 어른벌레가 된다. 알, 애벌레, 번데기, 나방으로 이어지는 일생이 한달 가량이다. 여름 동안 3세대를 경과한다. 담배나방의 경우, 애벌레 시절은 대부분 고추 열매 속에서 지내기에 방제가 대단히 어렵다. 이 점이 농민들의 고충이다. 살충제가 제대로 들을 리 없다.

하여간 녀석들은 악독하다. 어린 날 ‘담배 먹고 맴맴, 고추 먹고 맴맴…’ 노랠 자주 불렀더니 녀석들은 맵지도 않은 모양이다. 귀가 멍멍하지도 않는 모양이다. 찬물도 마시지 않는다. 그래도 성이 차지 않아 고추 열매에서 구멍을 뚫고 빠져 나와 또다른 열매의 꼭지나 잎 뒷면에다 알을 낳는다. 3, 4일 안에 깨어나라 부추긴다. 그리고는 날개를 달고 파닥여 ‘용용 죽겠지’ 하며 날아가 버린다.

고추벌레는 농부들을 울리는 파렴치한이다. 그처럼 농사를 잡치고도 부족하여, 여름 밤 고단한 농부의 전등가에 숱한 나방들에 섞이어 신분을 감춘 채 날아든다. 무력한 자신을 탓하며 말똥담배를 말아 연기를 뿜어 대던 내 아버지. 당신 곁에도 담배나방은 밤마다 그렇게 날아왔으리란 걸 이제야 알겠다. 어린 우리들은 보았다. 잎담배 매상(買上) 때 등급을 손해볼 수 없다고, 전매청 감정원들한테 색시집에다 맥주에다 불고기에다 힘닿는 데까지 대접하려 안달을 부리지 않으셨던가. 우리는 보았다. 애면글면 지은 고추 농사, 장사꾼들 농간에 넘어가곤 하지 않던가.

알 수 없는 일이다. 고추, 담배나방, 인간 가운데 누가 가장 매운 존재일까. 아니다. 남을 탓할 형편이 아니다. 돌이켜보면 나야말로 지독한 녀석이다. 어버이, 형제, 아내, 딸들… 얼마나 많은 이들의 가슴 속을 갉았던가. 그 자양분으로 살쪘다. 그리고는 그럴싸하게 문학으로 위장한 날개를 달고 은신처 아닌 은신처로 날아와 버렸지 않은가. 생각해 보면 나야말로 몹쓸 고추벌레, 담배나방이다.

 

 

 

윤근택

월간 에세이로 등단(89년). 현재 한국통신 근무.

저서 『독도로 가는 길』, 『이슬아지』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