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연구실의 새 주인은

                                                                                                정진권

 내 주머니에는 열쇠 꾸러미가 하나 들어 있다. 대문 열쇠, 현관 열쇠, 연구실 열쇠, 자동차 키. 이 중에서 제일로 자주 쓰는 것이 연구실 열쇠다. 정도 많이 들었다. 그러나 나는 머잖아 이 열쇠를 학교에 반납해야 한다. 그러면 이 연구실의 새 주인이 물려받을 것이다. 적잖이 섭섭하다. 왜 섭섭할까?

이 열쇠로 연구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바로 문 옆 왼쪽 벽에 하얀 세면대가 하나 붙어 있다. 수도꼭지가 둘이다. 찬물도 나오고 더운 물도 나온다. 세면대 오른쪽에는 깨끗한 수건도 한 장 걸려 있다. 수업을 마치고 돌아오면 나는 이 물로 허옇게 분필가루 묻은 손을 씻는다. 그러나 손을 씻으면서도 나는 늘 무심했다. 이 연구실의 새 주인이 되어올 사람은 어떨까? 가르칠 학생이 있고, 가르치는 일이 있고, 그리하여 손을 씻을 수 있다는 것을 누군가에게 깊이 감사하며 이 세면대 앞에 설 것이다.

이 세면대에서 안으로 조금 들어가면 작은 의자가 둘 나란히 놓여 있다. 학교에서 이 의자를 놓아준 가장 큰 뜻은 학생들이 상담을 하러 올 때 그들을 앉히라는 뜻일 게다. 그러나 나를 찾아온 학생들이 이 의자에 앉은 일은 거의 없다. 그들의 대부분은 결석 많이 한 녀석, 시험 못 본 녀석들이다. 그들은 싸늘한 얼굴로 야단을 쳐대는 선생 앞에 말도 제대로 못하고 서 있다가 돌아가곤 했다. 이 연구실의 새 주인은 학생들을 이 의자에 앉히고, 그들이 괴로워하는 문제에 대하여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눌 것이다.

이 의자에서 마주 보이는 서쪽 창 아래 무쇠로 만든 라디에이터가 하나 놓여 있다. 겨울이면 오전, 오후로 한 차례씩 스팀이 들어온다. 한 차례씩이기는 하지만 스팀이 들어오는 시간이 길어서 온종일을 있어도 추운 줄을 모른다. 고마운 시설이다. 그런데 나는 연구실을 비우는 날에도 이 라디에이터를 그냥 열어두었다. 얼마나 많은 스팀이 헛돌았을까? 이 연구실의 새 주인은 그러지 않을 것이다. 어려운 재정으로 스팀을 넣어 주는 학교를 고맙게 생각하며, 연구실을 비울 때는 알맞게 잠글 것이다.

이 라디에이터를 발치에 두고 야전 침대가 하나 놓여 있다. 밤을 새워 공부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연구실에 침대가 있는 것은 별로 보기 좋은 모양이 못 된다. 그러나 나는 이 침대를 버리지 못한다. 점심 먹고 한 이삼십 분, 여기 누워 설핏하게나마 눈을 붙이고 나면 무슨 새로운 활력이라도 공급받은 듯 온몸이 개운해지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사오십 분씩 낮잠을 자는 일도 생기게 되었다. 새 주인은 어떨까? 설령 이 침대를 그냥 둔다 할지라도 게으름을 향락하는 데 쓰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이 침대를 뒤로 하고 책상 하나가 남쪽 벽을 향해 앉아 있다. 나는 이 책상에 앉아 많은 글을 썼다. 그리고 한 편씩 그 쓴 글을 발표할 때는 은근한 자부심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 다시 읽어 보니 모두가 시시하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그저 그런 글들이다. 그럼 이 연구실의 새 주인은 어떨까? 그는 좋은 쌀과 잘 뜬 누룩을 알맞게 섞어 향기로운 술을 빚듯, 그가 정확하게 관찰한 사실과 자신의 깊은 사색을 충분히 발효시켜 향기로운 술보다도 더 향기로운 글을 써 낼 것이다.

이 책상 왼쪽으로 서가가 셋 나란히 놓여 있다. 삼사백 권에 불과한 빈약한 서가다. 삼사백 권, 그러나 이 중에는 내가 통독도 못한 책이 수두룩하다. 어떤 책은 내일 읽지 모레 읽지 하며 그냥 꽂아두고, 어떤 책은 서론이나 겨우 읽고 덮어 두기도 했다. 국문학도라면 당연히 숙독해야 할 어느 고전 선집도 나는 필요에 따라 여기저기 몇 줄씩 읽고는 다 읽은 것으로 착각해 왔다. 이 연구실의 새 주인은 책이 얼마나 될까? 어떻든 그의 서가는 두 번, 세 번 정독한 책으로 가득 차 있을 것이다.

떠날 때가 되면 떠나야 한다지만 그래도 섭섭한 것이 사람의 상정이다. 하물며 짙은 후회 속에 떠나는 사람임에랴. 문득 이 연구실의 새 주인으로 올 누군가의 모습이 붓끝에 어린다. 먼 훗날 그가 이 연구실을 떠날 때는 어떨까? 그도 사람이니 조금은 섭섭할 것이다. 그러나 후회 없이 살았으니 나 같은 섭섭함은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