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초 무늬 담배 케이스

                                                                                           김유빈

 인주(印朱)의 붉은색이 깊숙이 스며들어 있는 상아 도장, 짙은 갈색 얼룩 무늬의 쇠뿔 안경테, 거의 검게 변한 은제(銀製) 담배 케이스, 과일 깍는 칼보다 더 큰 손잡이 달린 면도칼, 소화(昭和) 18년이라고 인쇄되어 있는 일제(日帝) 시대의 채권들 묶음.

이것들은 어머님의 유품을 정리하다 찾아낸 아버님이 쓰시던 물건들이다. 어머님보다 40년 더 먼저 세상을 떠나셨고, 그때 초등학생이었던 나에게는 기억조차 희미한 아버지, 그 아버님이 지니셨던 것 몇  점이 어머님의 장 속에 보관되어 있었던 것이다.

사실 어머님이 돌아가시고도 한동안 어머님 방을 정리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머님의 체취가 그대로 남아 있어 정리를 한다는 것이 죄송하기도 했고, 제사를 지낸 후 그 꼭꼭 눌러담은 하이얀 뫼에 선뜻 손이 가지 않듯 왠지 손을 댈 엄두가 나지 않았다는 것도 솔직한 고백이다.

그렇게 49제를 지냈고, 또 한참을 더 지난 후에야 장롱을 열었다.

유품들은 평소 어머님의 성품 그대로 검소하고 정결했으며, 이미 자신의 손으로 정리가 끝난 상태였다. 40여 년을 홀로 세 아이 공부시키고 시집 장가 보냈으니 귀한 것 무엇 하나 남아 있을 리 없었다. 그래도 딸에게조차 맡기지 않았던 열쇠가 있어 오래 된 괘목 서랍장을 열어 보았더니 바로 이것, 반백 년 전 아버님이 쓰시던 물건이 작은 손가방과 함께 들어 있었던 것이다.

크게 실망할 수도 있었다.

그 서랍 속에 돈뭉치나 금붙이가 들어 있으리라고는 생각 않았지만 그래도 이재(理財)에 도움이 되는 무엇이 조금은 있지 않을까 농담처럼 얘기해 왔었는데 아버지의 유품이라니…….

열쇠가 달린 유일한 서랍이라면 당연히 그 속에는 재물이 들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나의 통속적인 머리가 한 대 얻어맞은 느낌이었다고 할까.

어머님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남편의 손때가 묻은 안경테, 손가방들이었던 것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나는 아버지의 유품보다 그것을 간직하고 계셨던 어머님의 심경이 마음에 와 닿는다. 그리고는 오랫동안 주저앉아 있고 싶은 나른한 감회에 빠지고는 한다.

6·25의 혼란 속에서 남편을 떠나 보냈고, 부산에서 서울로 또 서울에서도 대여섯 번의 이사를 했으니 그 생활이 얼마나 힘들고 각박했을까. 그 와중에 망부(亡夫)의 유품 몇 점을 오롯이 보존하고 계셨던 것이다. 잃어 버릴 수도 있었고 소용에 닿지 않는 것이라 없애 버릴 수도 있었을 터인데.

그렇지만 왜 그것을 자식들에게 보여 주지 않았던 것일까. 여자는 평생 추억이 담긴 보석 상자 하나를 가슴에 품고 산다더니, 이것이 어머님의 보석 상자였을까. 아니면 고향이 평양이신 어머님은 이북 출생 여자들이 생활력이 강하다는 세평(世評) 그대로 참으로 강인한 분이셨다. 그러니 아버님의 유품 몇 점을 보석처럼 지니고 계시는 자신의 모습을 자식들에게 보이기 싫으셨던 것일까.

 

며칠 전 집에 들른 큰 사위가 “어머님 이것 좀 보세요” 하고 꺼낸 것은 반짝반짝 윤이 나는 은제 담배 케이스였다. 지난 정초에 식구들이 모였을 때 거의 검은색인 아버님의 그것을 보여 주었더니 “제가 한 번 닦아볼께요” 하고 가져갔었는데, 얼마나 정성들여 힘들게 닦았는지 뽀오얗게 새것이 되어 돌아왔다.

그 전에는 보이지도 않던 음각(陰刻)의 당초(唐草) 무늬가 케이스 전체를 정교하게 감싸고 있는 것이 품위까지 갖춘 귀물(貴物)로 변해 버린 것이 아닌가.

“정말 예쁘지요……?”

그 말을 하는 사위를 바라보며 나는 문득 한 생각이 떠올랐다.

‘그래, 이 사람이 임자겠구나. 얘기조차 들어 본 적이 없을 처의 외할아버지 유품에 이렇게 정성을 쏟아주고 새로운 생기를 넣어 주다니.’

모든 물건이 다 그러하지만 유품은 더더욱 그것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지녀야 하는 것 아닐까.

“자네 이것 가질 텐가?”

내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입이 귀밑까지 찢어지는 사위의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저 하늘 위에서 빙긋 웃고 계시는 어머님의 얼굴도 보이는 듯했다.

 

 

 

김유빈

동서문학으로 등단.

공동 수필집 『떠오르는 빛』, 『나무로 만나 숲으로 서다』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