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료작-

환상처럼

                                                                                                박현정

 오늘 밤 내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준다면, 다음 날 너를 죽이지 않겠다는 약속에서 시작되는 천일야화의 이야기에는 사람의 정신을 앗아가는 환상 이야기가 넘친다. 하늘을 가린 빌딩들, 거칠게 달리는 자동차들, 자연 재해가 몰고 오는 불행, 그리고 쉽게 와 주지 않는 행운과 기다림 속에 사는 사람들에게 그런 환상 이야기가 없다면 우리는 너무 일찍 늙어 버릴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영화에, 텔레비전 드라마에, 다른 사람의 인생에 그토록 관심이 많은 것이다.

과천에 온 후 처음 나간 교회에서 내게 가장 낯설었던 것은 낮은 천장이었다. 콘크리트 건물에 하얀 칠을 하고 그 사이에 전등이 여러 개 밝혀진 채 왼쪽 상단 구석에는 물이 샌 자국으로 얼룩진 천장이었다. 그 낮은 천장이 이상하고 답답했던 것은 전에 내가 이십 년 넘게 다닌 교회의 높은 천장에 익숙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였는지 교회 천장은 그렇게 높아야 된다고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었나 보다. 시골에 있던 그 교회는 상당히 오래 되었는데 세월의 흐름에 따라 여러 차례 증개축하였다. 그런데 본당의 기본은 그대로 유지해서 그 천장의 높이도 그대로였다.

도시의 교회에서 낮은 천장을 경험한 후에 나는 시골 교회의 높은 천장이 내게 주었던 정서를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아마 높은 천장에서 두려움과 함께 어떤 환상이나 막연한 희망 같은 걸 가졌던 듯하다. 우리의 죄, 예수의 재림, 그런 것들은 영원 속에 파묻힌 알 수 없는 곳에 있다는 생각과 함께 내 미래 역시 저 천장처럼 높고 먼 곳에, 또 거기에 주렁주렁 매달린 샹들리에처럼 우아한 공간 어디에 있을 거라는 환상을 가졌던 것 같다. 그러다 낮은 천장으로 바뀐 공간에서 이제는 현실로 다가온 내 삶과 사람들의 인생을 읽어보게 된다. 이제 내 삶은 어디 저 먼 곳에 있지 않다는 것, 인생은 끝없이 펼쳐진 자유의 공간이 아닌 자신의 한계 내에서 발버둥쳐야 하는 답답한 공간이라는 것이 깨달아졌다.

그 낮고 하얀 천장과 단순한 등불, 얼룩들은 내게 네 삶을 보라고 말하고 있었다. 이제 어린 시절의 환상은 벗어버리라고, 너 역시 이 낮은 천장 아래 묶여 사는 보잘 것 없는 이들 중에 하나라고, 그리고 사랑이나 죄, 신과 같은 의미도 결국 소소한 우리 삶의 갈피 안에 있음을 일러주고 있었다. 낮게 드리운 천장은 삶의 실체를 보여 주는 하나의 우울한 상징으로, 일상에서 겪는 작은 기쁨을 놓치지 말라는 친절한 위로로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에게 미래가 있다고 여겨질 때는 가난도 외로움도 두렵지 않게 된다. 지금의 현실은 잠시 내가 건너야 할 강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종교를 일반인들을 향한 통치 수단으로 삼았던 시대, 종교 건물을 그렇게 웅장하고 신비하게 세웠던 이유 중의 하나는 일반인들의 억눌린 욕구를 환상 속에서 잊게 하려는 지배층의 속셈이 작용했을 것이다. 어쩌면 좌절된 사람일수록 그런 마약 같은 환상이 필요할 것이다.

가끔 우리의 삶이 정말 꿈 꾸기인지 꿈 깨기인지 모호할 때가 있다. 꿈과 환상은 다른 의미지만 비슷한 면도 지니고 있다. 이솝 우화에서 우유 짜는 아가씨가 우유를 팔기도 전에 멋진 남자의 청을 거절하는 환상 속에서 우유를 엎질러 버린 것이 현실이 받쳐주지 않는 환상으로 망한 경우라면, 전설의 도시 트로이를 발견한 슐리만은 현실과 환상이 조화를 이룬 한 예를 보이고 있다. 어쩌면 사람들이 지닌 그 환상들이 이루고 싶은 꿈으로 이어지고 현실이 되어 인간을 노동에서 해방시켜 문명을 이루게 하고, 우리의 발걸음이 우주로 향하게 한 계기가 되게 했을 것이다.

그런 실질적인 환상과 함께 우리를 위로하는 환상이 있다. 톨스토이는 사람에게 시간과 여유가 생기면 악마성이 나타난다고 했지만, 우리에게는 고통받은 영혼이 휴식할 시간이 필요하다. 그래서 우리는 꿈 같은 이야기를 듣고 옛사람들을 만난다. 간혹 내게도 이야기에서처럼 내가 상상한 그 환상이 이루어지기를 꿈꾸기도 하면서.

어린 시절, 교회의 높은 천장에 나 있던 작은 창으로 내리비치던 햇살을 보며 천사가 내려올까 하며 눈을 감던 일, 평일에 친구와 오래 된 성당에 놀러갔다가 그 안에서 어떤 소리가 울리는 듯해 몸을 떨던 일, 지금 좀 게으름을 피우며 살아도 시간은 얼마든지 나를 위해 있을 것만 같던 시절, 높은 천장 아래서 누리던 나태한 환상을 다시 한 번 만나고 싶다.

 

천료 소감

 

 

처음 ‘아웃사이더의 고백’을 썼을 때 제겐 무엇보다 부끄러움이 앞섰습니다. 그리고 이런 제 내면의 이야기가 수필 작품이라는 이름으로 책에 실린 것은 하나의 경이(驚異)였습니다.

어린 날의 그 긴 하루, 목까지 차오르던 기다림의 날들, 양초 칠한 마룻바닥에서 올라오던 냉기……. 글을 쓰면서 어둠 속에 숨어 있던 어린 시절이 제 가슴에 섬세하게 떠오르는 것 역시 놀라움이었습니다. 어쩌면 그 시절의 빛깔은 어른인 우리 영혼의 고전이고, 때로 삶의 전부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대답 없는 기다림처럼 우리를 지치게 하는 것도 드물 겁니다. 제 어눌한 이야기에 그렇구나 라며 손을 내밀어 대답해 주신 계간 수필에 감사드립니다.

                            

                                                                                                               ─ 박현정

 

1968년생.

원광대학교 독어독문학과 졸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