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원의 향기

                                                                                               서명희

 이슬이 걷히지 않은 이른 아침, 물안개 고운 바다를 보며 상큼한 바람을 안고 가을 들녘을 걷는다. 산비탈에는 보랏빛과 흰빛의 들국화 무리가 잔잔히 피어 있어 내 발길을 멈추게 한다. 가을만큼 와 버린 내 삶이 애절해 그 마음을 달래듯 들국화 한아름을 가슴 가득 안고 돌아왔다.

돌 확에다 꽃을 흐드러지게 꽂아 두니 들국화 향기가 집안에 가득하다. 갑자기 이 향기를 같이 해 줄 친구가 그리워진다. 녹차 한 잔을 끓여 우려내며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약속도 없었는데 이 멀리까지 올 수 있는 친구가 그리 많지는 않겠지만, 짙은 가을 분위기로 마음의 충동을 일게 할 양으로 목소리부터 나지막이 잠기며 가을 타령을 했다. 나를 보러 옴인지, 들국화 향기가 그리운 것인지, 모여서 오겠다는 대답을 얻어냈다. 몇 해 전, 막내아들 대학에 들여 보내놓고 늘 노래했던 전원주택을 장만하여 들어와 살면서 계절 따라 친구들을 불러들이는 내 모양새이다.

친구 맞을 준비를 시작한다. 속이 덜 찬 배추를 한 광주리 씻어 놓고 쌈 된장 만들어 참기름을 넉넉히 붓는다. 불려두었던 까만 콩을 얹어서 밥 한 솥을 안쳐두고, 추수해 놓은 밤과 고구마는 씻어 찜 솥에 받쳐 둔다. 오밀조밀한 들국화 무늬가 있는 커피 잔을 꺼내 놓고 과일은 커다란 옹기 접시에 푸짐히 담아 테이블 위에 올려둔다. 어제 꺾어두었던 갈대를 거실로 옮겨놓고 마지막으로 비발디의 사계를 오디오에 걸어 두니 가을 손님 맞을 준비는 어지간히 된 셈이다. 그제사 차게 식어버린 녹차를 음미하듯 한 모금 마시며 가슴 가득한 행복함을 아릿하게 느낀다. 시골로 들어와 사는 나의 용기와 감성에 내 스스로 고마워진다. 나는 굳이 도시에서 살아야 할 일이 없는 이들에게 전원생활의 여유와 행복을 나누려고 이웃해서 살 것을 권해 본다. 그러나 듣고 있는 쪽에서 이룰 수 없는 먼 꿈으로나, 여유 있는 사람들의 유세쯤으로 생각해 버리면 안타까워진다.

시골의 집이란 이삼백 평을 사도 서울의 아파트 전셋값이면 될 것이다. 생활비는 자급자족의 부분이 보너스처럼 생겨날 수도 있으니 마음먹기에 따라 평수 넓은 아파트의 유지비만 해도 풍요로울 수 있을 텐데. 병원 걱정에 개구리, 뱀, 모기까지 들먹이며 손을 저어 버리면 가슴이 답답해진다. 시골이라고 병원이 그리 멀리 있지도 않지만 어디서고 119를 부르면 길 막히는 서울보다 빨리 도착하니 걱정할 정도는 아니다. 뱀은 풀숲에 들어갈 때만 목이 긴 신발을 신고 조심하면 된다. 개구리는 노래도 정겹고 서울 자동차 먼지에 오염된 사람들보다 깨끗하니 우리에게 해될 짓은 하지 않는 동물이다.

모기는 숲에서 나오는 맑은 공기 마시는 대가로 세금내듯 몇 번 물려줄 수도 있을 테고, 또 효과 높은 모기 약이 많으니 큰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리고 문화 공간은 매일 가는 것이 아닐 것이다. 한 달에 두어 번 서울 나들이가서 영화도 보고 쇼핑도 하고 전시회도 가 보고, 오래 못 본 친구를 만나서 분위기 있는 찻집에 들러 차 한 잔 나누고, 유유히 밤바람 맞으며 돌아와 심신을 다독이면 된다. 우리 모두 흙으로 돌아가야 하는 몸, 병원이 가까운 것보다 자연에 가까이 사는 것이 수명 연장에 훨씬 좋을 듯하건만…….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한참 동안 시간을 보냈나 보다. 밖에서 진실이가 손님 왔다며 짖어대는 소리와 친구들의 달게 웃는 소리가 정다운 화음이 되어 나를 바삐 움직이게 한다. 친구들은 촌여자 주려고 빵이랑 고기를 사 왔다며 마음 쓴 보따리를 풀어놓는다. 여기에 와야 푸짐히 먹고 느긋하게 쉴 수 있다며 시골의 정취를 아는 친구들의 웃음이 편하다. 우리들은 한참을 반가운 인사와 소식을 전하다가 거실 밖의 풍경에 조금씩 마음을 뺏긴다.

서쪽과 북쪽으로 연결된 통창 밖으로 아름다운 영상이 장면 장면 이어지고 있다. 아득히 섬들이 떠 있는 서해 바다와 야트막한 산. 아주 작은 일렁임의 갈대, 선 채 말라버린 고추밭의 잡풀들, 듬성듬성 쌓아 놓은 볏짚, 상수리나무의 낙엽은 미련을 떨치듯 후르르 떨어지고, 텅 빈 들판의 황량함까지 가을 끝자락의 풍경이니 감정들을 주체할 수 없어 자칫 눈물이라도 떨굴 듯하다. 참으로 정겹고 아름다운 모습이다. 자연에 취하는 순수함이 나이를 잊게 하고 있는 것이다.

모두들 가을에 잠겨 서러워지려 할 때 한 친구가 벌떡 일어나서 “먹자” 하며 분위기를 바꾼다. 역시 가을은 식욕의 계절이다. 한 광주리 씻어 놓은 배추가 금세 바닥을 보이고 밤, 고구마에 마지막으로 커피까지 마시고 난 친구들은 내가 여기에 살고 있는 것이 저희들 복이라며 웃는다. 나의 전원생활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친구들이 있다는 것에 커다란 힘을 얻는다.

풀벌레 소리에 장단맞춰 나직이 노래하며 바라보는 밤하늘. 애써 불러오지 않아도 내 집 문전에서 지천으로 피고지는 들꽃들. 계절 따라 향기 다른 바람은 내 마음의 때까지 씻어주니 모두가 전원에 사는 복일 것이다. 이곳에서 전원의 향기를 나누어 가질 친구들을 기다리며 들풀의 겸손함을 배워갈 것이다. 나의 가을은 여기다 부려놓고 나의 겨울을 여기서 기다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