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소식과 일기

                                                                                                 황필호

 ‘하늘에는 새의 발자국이 없고’로 제18회 현대수필문학상(2000.1.8)을 받은 김국자의 수상 소감에 이런 구절이 있다.

‘인생은 한 편의 긴 수필이라 생각됩니다. 저의 수필은 일기를 쓰는 것으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글을 쓰면서 세상이 달라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평소 무심히 지나쳤던 사소한 사물조차 문득 새로운 의미로 다가왔습니다.’

전혀 아름다운 문장도 아니고, 새로운 내용을 담고 있지도 않다. 아마 나도 옛날 언젠가 일기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글을 썼을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위의 글을 읽으면서 스스로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다. 현재 나는 전혀 일기를 쓰지 않고 있을 뿐만 아니라 생각이 없는 글을 쓰고, 생각이 없는 말을 하고, 반성이 없는 행동을 하고, 명상이 없는 삶을 영위하고 있으니 말이다.

소크라테스는 반성하지 않는 삶은 살 가치조차 없다고 했다던가. 프랑스의 철학자 레비나스는 서양 철학을 셰익스피어에 대한 명상 이상이 아니라고 했던가.

반성과 명상은 우선 ‘평소 무심히 지나쳤던 사소한 사물’을 좀 세심하게 관찰하고, 얼렁뚱땅 했던 말을 다시 마음 속으로 생각하고, 미문(美文)으로 장식했던 글을 내용이 알찬 명문(名文)으로 쓰려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 “글을 쓰면서 세상이 달라 보이기 시작했다”고 고백할 수 있으리라. 나는 이런 태도를 오주선의 ‘방아닷골의 달’의 한 문장에서 읽어내게 된다.

‘누워서 달빛을 보기가 미안해서 일어나 거실로 나온다.’

그렇다. 누워서 달빛을 본다는 것은 달에 대한 모독이며 자신에 대한 경멸이다. 적어도 거실로 나와야 한다. 그래야 생각도 나오고 명상도 나온다.

역시 제18회 현대수필문학상을 받은 김용복의 ‘선(禪)과 글 사이’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작가는 ‘네 잠을 다 자고 오령(五齡)에 들어선 누에가 섶에 오르기 직전과 같은 투명함을 전신(全身)으로 발산’하고 계신 청화(淸華) 스님을 찾아 “정(定)에 들려고 자리에 앉아 저 자신과 제 둘레를 둘러보면 앞뒷이 깜깜하게 막힌 이런 상태로 글을 쓴다는 것이 아무래도 부질없는 구업(口業)만을 잔뜩 짓고 있는 것만 같아 두렵습니다”라고 고백한다.

여기에 대하여 스님은 “과정이 다르고 근기(根機)가 다른 사람들에게는 같은 말 한 마디가 쓸데없는 구업이 되기도 하고, 천금(千金) 같은 법문(法門)이 될 수도 있다”고 말하면서 이렇게 충고한다.

“다만, 어느 땐가는 시간을 잡아 한 3주일 정도 이런 산사(山寺)를 찾아 가행정진(加行精進), 줄기차게 밀어붙여 보실 것을 권해드립니다. 선이란 하다가 중단하면 다시 무너져버리고 마는 것이 아닙니까. 선생님의 경우 한 소식 얻고 난 다음에 붓을 들면 새로운 활기가 생겨나리라 믿습니다.”

내 꼬라지는 어떤가. 한 소식도 못한 주제에 정진도 하지 않으며, 정진도 하지 않은 주제에 반성의 생각도 없으니, 나도 오늘부터는 일기를 쓰기로 결심한다.

 

 

 

황필호

생활철학연구회 대표. 한국비교철학회 회원.

계간 『어느 철학자의 편지』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