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센트

                                                                                                권일주

 감흥이 야금야금 식어지고 나면 귀찮다는 생각만 남을 것 같아 사진을 뽑아온 날 바로 새 앨범을 앞에 놓고 앉았다.

여행에서 돌아온 지 사흘째, 집에 돌아왔다고는 해도 커다란 여행가방은 분명 돌아왔건만 열사흘 떠나 있던 자리에 몸도 그렇거니와 마음도 아직 완전히 돌아오지 못하고 있었다. 꿈결엔 듯 ‘여기가 어디더라’ 하면서 깨어나거나, 커다란 배의 먼 엔진 소리에 떠밀려온 약간의 진동이 침대를 흔드는 듯한 느낌에 여전히 눈을 뜨곤 한다. 그런 여운에 편승해서 재빨리 사진 정리를 끝내자는 것이 내 속셈이었다.

우선 맨 처음으로 갔던 곳에서 제일 먼저 찍은 사진을 기억을 더듬어 찾아내고, 그 뒤를 이어 차례차례로 순서를 잡아나갔다. 기억력이 아주 부실한 내게는 이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벌써 이것이 어디더라 하고 혼동이 생기는 것들이 나오기 시작했고, 그럴 때마다 현상된 필름을 불빛에 비춰보며 순서를 잡아야 했다. 일단 사진으로 이렇게 순서를 잡아나가는 과정이 내게는 아주 중요하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내 기억이라는 것은 제멋대로 조각조각 날아다니곤 해서 세계 지도를 아주 쉽게 바꾸어 놓을 것이고, 크렘린 궁을 페테르부르크에 있는 것으로 하거나, 아르바뜨 거리쯤으로 턱하니 옮겨놓고 시침을 뚝 떼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것도 모자라서 몇 장인가의 사진들은 사진 정리가 다 끝났는데도 길을 잃은 미아처럼 갈 곳을 잃고 어리벙벙한 표정으로 남아 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순서를 잡아놓고 앨범 한 면에 사진들을 두 장씩, 석 장씩 붙여나갔다. 그러자 아직은 그리 멀리 도망을 가지 못한 낯선 땅에서의 그때의 흥분이 사진을 따라 다시 고개를 들었고, 그것들이 꼽히는 순서를 따라 나는 다시 한 번 구경을 하는 셈이 되어 그 다음, 또 그 다음으로 한동안을 부지런히 따라갔다. 그래, 이곳에서는 햇살 때문에 눈을 뜰 수 없었지, 여기 이 돌에 새겨진 조각은 참 엄청났었어, 그때는 느닷없이 웬 비가 그렇게 쏟아졌나 몰라, 그래 맞아, 여기에서는 눈만 들면 사방이 말 그대로 모두 포토 제닉이었지.

정신없이 사진을 붙여 나가다가 반쯤 정리가 되었을 무렵 나는 허리를 필 겸 손을 멈추고 커피 한 잔을 끓여다 놓고 앞서 붙인 것들을 다시 들춰보게 되었다. 그러나 몇 장을 들춰보다가 나는 그만 탁 덮어버리고 그 자리에 벌러덩 누워버리고 싶었다. 그것들은 이미 내가 많이 보아오던, 새로울 것도 없고 놀랄 것도 없는 그런 사진들에 지나지 않았다. 책에서 신문에서 잡지들 혹은 엽서에서 흔히 보던 사진 그 이상은 아니었다. 다른 것이 있었다면 턱 아래로 늘어진 근육이 뚜렷하게 보이고 긴장되지 못한 모습이며 아무렇게나 걷는 모양새가 정지된 영상 속, 바람에 날리는 겉옷 속에서도 뚜렷이 내비치는, 그렇게 나이든 여자가 그 풍경 속에 끼어 있을 뿐이었다. 내가 다녀온 것이 불과 며칠 전의 일이건만 어째서 이렇게 생동감이나 신선한 느낌이 없고, 전에 익히 보아오던 그런 사진들과 같아 보이는 것일까.

사진 붙이는 일을 일단 멈추고 나는 큰 여행가방과 그때에 들었던 손가방, 또 작은 손지갑까지 모조리 가지고 나와서 속주머니까지 뒤져냈다. 그때 입었던 겉옷들과 우비의 안주머니에도 손을 넣었다. 여러 곳의 안내 책자, 커다란 지도, 여기저기서 구입한 그림엽서들과 팸플릿, 입장권 등이 나오고 발레 공연장의 좌석 표도 나왔다. 지하철 표와 기차 표도 있고 생맥주를 한 잔 하러 들어갔다가 예뻐서 슬쩍 주머니에 넣었던 종이로 된 컵 받침도 있었다. 공중화장실 영수증도 잔뜩 구겨진 채로 한 장 나왔다. 나는 그것들을 귀한 것 다루듯이 반듯하게 잘 펴서 저마다 제자리라고 주장하는 사진들 사이사이에 끼어 넣었다. 그러자 사진들에 표정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갑작스럽다고 할 만치 페이지마다 생기가 돌았다. 무뚝뚝하게 그냥 서 있기만 하던 키 큰 자작나무 숲의 잎새들이 바람결엔 듯 술렁술렁 대는 듯이 보이기도 했고, 한 손에 기차 표를 들고 또 한 손으로는 무거운 가방을 끌고 가는 바쁜 내 모습이 보이는 듯도 했다. 이제 비로소 그것들은 잡지 속에서 보아온 사진이 아니라 내가 바로 며칠 전에 다녀온 곳이 되었다. 긴 음절에 악센트를 제대로 찍은 것 같은 그런 기분이었다.

하잘것없다고 생각하고 조금은 건방을 떨며 소홀히 던져버린 종이조각들에 해당하는 것들이 내가 살아온 길에도 무수히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주 작은 깃털 하나, 새하얀 손수건 한 장을 평상복 위 포켓에 꼽아보면 금세 훌륭한 파티복이 될 수도 있는 요술 같은 일이 우리의 삶, 어제가 오늘 같은 그 나른한 길 위에도 널려 있는 듯하다.

짧은 여행의 앨범을 정리하는 기회에 내 기억의 저 맨 구석, 가슴 제일 깊숙한 곳에 자리한 속주머니도 함께 뒤져내어 내가 살아온 그다지 길지 않은 세월에 표정을 그려 넣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