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촌(凡村)과 나

                                                                                              윤모촌

 수필이 어떤 글인지를 모르면 수필처럼 쓰기 쉬운 글이 없고, 수필의 진수(眞髓)를 알면 수필처럼 쉽지 않은 글이 없다. 명수필을 남긴 근원(近園)이 바로 이런 뜻을 말한 바가 있다. 나는 뒤늦게 수필을 쓰기 시작하였지만, 근원의 말은 미처 깨닫지도 못하였다. 쉬운 것으로 알았기 까닭이다. 아무튼 수필을 쓰기 시작한 것이 늦기는 하였지만 이 정도로나마 쓰게 된 것은, 좋은 문장을 대한 덕이었다. 내가 좋은 문장이라 함은 언어와 정서의 논리를 벗어나지 않아서, 말장난의 글이 되지 않고 있는 것을 말한다. 오늘처럼 수필 강좌가 있거나 수필 작법책 같은 것이 있어 읽었다면 힘을 덜 들이고 터득했을지도 모른다.

근래에 와서 좋은 수필이 많이 눈에 띄는데, 이 중에는 현존(現存)하는 이도 있고 작고(作故)한 이도 있다. 이런 수필계에서 내가 영향을 받은 것을 든다면, 현존 인물은 물론이고 작고 문인 몇몇을 들 수 있다. 먼저 근원과 상허(尙虛)인데, 그 문사(文士) 풍류에 매료되지 않을 수가 없다. 이 두 문사의 풍류는 아마 앞으로 다시 만나기가 어려울 것 같다.

근원과 상허의 다른 면에서 영향을 받는 것은 소운(素雲) 수필이다. 극적 소재의 이야기들이 자질구레하지 않아서, 감동 폭의 무게와 깊이가 크고도 넓다. 거기에다 세상을 내려다보는 협기(俠氣)와, 체온으로 와 닿는 인간정신이 가슴을 쓸어내린다. 이와는 반대로, 달밤의 풍경 혹은 비온 뒤의 청산 같은 윤오영(尹五榮)의 서정에도 영향을 받는다. 이 밖에 간결한 필치로 풍자와 해학과 섬세한 감성의 이장규(李章圭)라던가, 삶의 깊이를 관조하여 삭막한 가슴에 윤기를 불어넣는 범촌 김우현(凡村 金于玄) 등을 들 수 있다.

내가 범촌을 안 것은 1979년 신춘문예를 거치고 나서인데, 그때 범촌은 월간 隨筆文學(지금의 수필 문학지가 아님)의 발행인이었다. 당시의 나는 수필계의 ‘수’ 자도 모르던 때였는데, 그는 자신의 사업을 제쳐놓다시피 하고 기울져가는 남의 수필(隨筆)지의 책임을 지고 있던 때였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만큼 그는 한국 수필문학의 진작(振作)을 위해서 심혈을 기울였다.

그런데 그런 그에게 나는 적지않은 폐를 끼쳤다. 79년의 이듬해인 1980년 1월호 수필문학(隨筆文學)지에 실린 내 글이 문제가 되어, 수의사협회로부터 고소를 당한 것이다. 그리하여 잡지사 대표로 범촌이 검찰에까지 불려다녔는데, 검찰이 화해를 주선하여 매듭이 풀리긴 하였으나 어려운 부담을 안게 되었다. 수의사 측이 화해 조건으로 주요 일간지 두 군데에 사과문을 실을 것을 요구하고 나섰던 까닭이다. 그래서 나는 난처하기 그지없었다. 적지않은 신문 게재료 때문이었는데(당시 16만 원), 가뜩이나 잡지사 운영에 어려움을 겪는 범촌에게 이만저만한 폐가 아니었다.

수의사와의 말썽이 무엇이냐 하겠지만, 그때 내가 쓴 ‘아낙 군수’라는 글에서 나는 내 실직(失職)타령을 하다가 직업 얘기가 나왔다. 이 직업 얘기에서, 사람 사람이 다 직업을 갖지만 그 직업에 어찌 보람을 다 느끼겠느냐 하고 나서, 도심 속의 초라한 동물병원을 내 시각으로 바라본 말이 수의사들의 심기를 불편케 했던 것이다. 이런 일이 있은 후 나는 범촌(凡村)의 천으로 수필문우회 회원이 되었고, 그가 작고하기까지 월례회에서 만났다.

범촌의 사무실에 들어서면 시선을 끄는 액자가 하나 있었다. 그의 인품을 말하기라도 하듯이, 찡그리고 찾아온 사람을 웃으며 돌아가게 한다는 ‘빈래소귀(嚬來笑歸)’이다. 이런 글귀를 걸어놓은 그는 언틀민틀한 용모가 부드럽고, 심지(心地)도 깊은 사람이었다. 당시에 나는 실직을 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가진 것도 없던 터라서, 자식놈들의 대학 등록금이 막막하였다. 하는 수 없이 아껴오던 고서화`─`위창(葦滄)의 73세 작 전서(篆書) 편액(扁額) 한 점과 묵란도(墨蘭圖)의 3대가(三大家)로 알려진 소호 김응원(小湖 金應元)의 난초 족자 두 점을 범촌에게로 가지고 가 내놓았다. 그때 두 놈의 등록금이 적지않은 금액이었지만 범촌은 두 말 않고 들어주어서, 나는 힘겨운 고비를 넘겼다.

범촌은 자기 사업을 제쳐놓고 남의 수필 잡지에 매달렸을 만큼 수필을 아끼고 좋은 글을 쓴 수필가이다. 그리고 토속적인 정서의 중후한 인품으로 회원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런 범촌의 글을 읽으면 마음이 편하다. 우리는 월례 모임에서 합평을 했지만, 일단 합평대에 오른 작품에 대해서 범촌은 냉엄하였다. 높은 안목에다 작자의 체면을 보는 일이 없어서, 늘 합평회다운 합평으로 모임에 의미를 싣곤하였다. 지금도 합평 모임은 지속되고 있지만, 나는 범촌이 없는 빈자리가 늘 아쉽다.

그런 그도 수필가로서 애증(愛憎)의 고뇌를 하였는데 그의 ‘한중잡상(閑中雜想)’을 보면 그런 면모가 잘 드러난다. ‘멍청히 앉았을 때가 더러 있다. 체계가 선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무아무념(無我無念)의 경지에 있는 것은 더욱 아니다. 그저 하찮은 편편잡상(片片雜想)들이 잠시도 쉬지 않고 내 머릿속을 멋대로 내왕하고 있다. 그 잡상들 중에는 별의별 것이 다 있다. 속되고 너즈레한 것, 치사스러운 것, 좀은 버젓하고 어엿한 것, 앙칼지고 표독스러운 것, 어질디 어진 것 등등이 앞뒤도 없이 제멋대로들 일었다 꺼지고 꺼졌다 일고 하며 있다.’ …….

이렇듯 내면의 갈등을 승화시키면서 그는 자신의 삶과 합일하는 수필을 쓰다가 애석하게도 일찍 세상을 떴다. 오늘도 나는 한국 수필문단에 그가 없는 자리가 너무 비어서 허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