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워 있는 화가의 소망

                                                                                                           고임순

 영하 13도의 강추위 속을 아랑곳없이 외출했다. 새해 들어 일주일 동안 작업실에 칩거하여 먹을 갈고 화선지 반절지에 3백 자 가까운 ‘십계명’을 쓰기를 일곱 폭. 충혈된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른다. 싸아하고 가슴을 훑어내는 강풍이 휘몰아치는 나뭇가지 사이로 보고 싶은 얼굴이 아른거린다.

‘네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 십계명에서 튀어나온 구절에 마음의 눈을 뜬다. 믿는자들이 지켜야 할 열 가지 계명을 글로는 쉽게 썼는데 행동으로 얼마나 실천하고 있는지 자신을 돌아본다. 집안에서 전혀 몰랐던 밖의 날씨에 움츠러드는 것은 비단 추위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나이들수록 남에게 베풀 일들이 늘어만 가는데 나는 늘 자기 본위에 그치고 마는 것에 서글픔을 느낄 뿐이다.

수원행 지하철을 타고 안양역을 지나 명학역에서 내렸다. 매운 칼바람이 사정없이 얼굴을 때리고 코끝이 얼어붙어 숨을 막는다. 머플러로 머리를 두르고, 오버 깃 속에 얼굴을 파묻고 계속 걸었다. 낯선 초행길이라 길을 물어 물어 집을 찾았다.

‘소울음 화실’은 삼성자동차 건물 2층에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휠체어에 누워 있던 최진섭 화가가 활짝 웃으며 반갑게 맞아주었다. 옆에서 인물을 그리고 있는 뇌성마비 환자 정군에게 얼굴 표정을 좀더 환하게 그리라고 지적하고 있었다. 정군은 고개를 끄덕이며 얼굴 전체에 웃음을 띄우고 온몸을 비틀면서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참 잘 그렸다고 칭찬해 주며 어깨를 다독거려 주었다.

장애 화가들의 낙원인 화실, 20평 남짓의 공간에는 크고 작은 유화들로 가득했다. 풍경화, 인물화, 정물화, 상상화 등 그들 나름의 고뇌가 독특한 색깔로 무늬져 있는 그림들은 도란도란 화기애애하게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는 것만 같았다. 신체의 장애를 극복한 뛰어난 직관력과 사물을 보는 따뜻한 눈으로 포착한 사랑과 생명과 시공을 초월한 그 의지, 어느 누가 그 앞에서 포로가 되지 않으랴.

그 중에 가장 나를 잡아 끈 것은 최화가의 ‘어느 겨울날’이라는 하얗게 눈이 내린 풍경화였다. 설경인데도 봄날 같은 따뜻하고 평화로움이 가슴으로 전달되는 그림 앞에서 결코 손끝이 아닌 눈과 마음의 붓으로 그린 그림임을 느꼈다. 프랑스 인상파 화가 르누아르처럼 그는 지병인 관절염 때문에 손가락에 붓을 동여매고 작업을 했는데, 주로 우아한 아름다움의 여성을 그린 것으로 유명하다. 고통은 곧 희망으로 가는 터널로 그 속에서 천착의 과정을 거쳐야만이 위대한 창작은 완성되는 것이다.

최진섭 화가는 8년 전 세브란스 병원 입원실의 남편의 이웃이었다. 그리고 붓글씨를 쓰는 나와 함께 지금까지 미술협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 동안 그와의 인연은 그의 소망이 하나하나 여물어가는 것을 지켜보면서 끈끈하게 이어졌다. 꿈꾸는 화가의 기도가 하늘에 닿았음인가, 그는 소망한 것을 매듭을 풀듯 이루어 나간 것이다.

93년 가을, 인사동 경인미술관에서 전시회를 갖는 첫번째 소망을 이루던 날, 나는 그를 찾아가 함께 기쁨을 나누었다. 그리고 95년에는 두 번째 소망인 결혼을 믿음의 딸 고경란 양과 백년가약을 맺음으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또 그 부부가 간절히 간구한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사랑의 선물인 자녀를 갖는 일이었다. 그런데 이 소망도 이루고 만 것이다.

최하민 양. ‘하나님 민족’에서 딴 이름을 지닌 1년 3개월이 된 천사를 만난 것은 저녁 무렵이었다. 교회에서 봉사활동을 마친 어머니가 아이를 안고 돌아와 우리는 어느 조촐한 식당에서 마주 앉았다. 하민이에게 두 손을 내미니, 낯가림없이 가슴에 안긴다. 뽀뽀하자고 하니 입을 크게 벌리고 달겨든다. 흑진주 같은 눈동자, 복숭아빛 피부, 무엇을 이미 알고 이 세상에 태어난 것 같은 신비한 눈빛이다. 땅속 토양의 자양분과 뜨거운 태양열과 신선한 공기와 수분을 받으며 한껏 자란 초목 같은 생명력을 이어받은 것같이 느껴졌다.

딸을 바라보는 화가 부부의 얼굴은 환희로 가득 넘쳐 온몸이 녹아드는 행복감에 젖어 있었다. 이 사랑의 분신을 위해서 혼신의 힘으로 각자의 길에 정진하고 있는 두 사람. 손가락 사이에 붓을 끼우고 누운 채로 그림을 그리는 화폭 속에 새로운 생명의 입김을 불어넣고 있는 아버지, 온몸이 부서지도록 교회 일에 봉사해도 그저 감사하는 마음으로 지칠 줄 모른다는 어머니, 딸의 존재로 하여 그들은 자신의 생명을 더 환하게 밝힐 수 있는 능력이 솟은 것이다.

하민이에게 누구보다도 예쁜 옷을 입히고 싶은 마음을 전하고 돌아오는 어둠 속에서 나는 아름다운 그림 한 폭을 그려보았다. 성장한 딸이 아버지 손가락에 붓을 갈아 끼워주며 그림 그리기를 도와 주고 있는 모습을. 그 할머니와 어머니가 한결같이 그렇게 했듯이 아버지를 도울 것이다. 그래서 누워 있는 화가의 그림은 더욱 생명의 불꽃이 타올라 생동감이 넘쳐날 것이다.

한파를 녹이는 이 아름다운 그림으로 하여 내 가슴이 마냥 훈훈하다. 오늘 나의 하루는 그들에게 얼마나 위로가 되었을까. 어머니, 아내, 딸로 이어지는 세 여인의 사랑으로 누워 있는 화가는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남자라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