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언(默言)의 즐거움

                                                                                                     이정호

 여름 휴가 동안 선수련(禪修鍊) 차 지리산 쌍계사를 다녀왔다. 새벽 세 시 도량석 목탁 소리에 잠을 깨면서 시작하는 승가(僧家)의 하루는 길들여지지 않은 내게는 무척 힘드는 일과였지만 정신없이 바쁘게 그날 그날 흘려 보냈던 내 일상(日常)을 차분히 되돌아보는 좋은 기회였다.

수련이라고 해서 별난 것이 아니다. 평소 생각 없이 지내던 일들을 찬찬히 의식적으로 점검하면서 어떤 것이 참된 나의 모습인가를 살피는 일이다. 먹고 배설하는 지극히 생리적이고 사소한 것들이 내 삶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새삼 일깨워 주었다. 앉아 숨쉬는 너무나도 평범한 행동을 통해서 바로 나의 존재를 인식할 수 있다는 사실을 체험하였다.

수행중에는 철저히 묵언(默言)을 해야 한다. 말을 하지 않고 어떻게 여럿이 함께 지낼 수 있느냐고 하겠지만 서로간 의사를 주고받는데 전혀 불편하지 않았다. 오히려 말없는 가운데 쓸데없는 오해가 일어날 소지가 없어 말을 주고받을 때보다도 훨씬 더 마음이 편했고 가까운 정을 느낄 수 있었다. 그 동안 쓰잘데 없는 말, 마음에도 없는 말을 너무 많이 했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말을 하지 않으니 눈과 귀와 생각이 한층 맑고 단순해지는 것 같았다. 내 눈과 귀와 의식이 잠시 쉴 틈도 없이 밖의 경계에 시달려 온 게 사실이다. 여기 조용한 산사에서 세상 소식을 접하지 않으니 그렇게 느긋하고 편할 수 없었다. 안으로 부족한 게 없으면 말이 필요치 않은 법, 묵언이 내 안뜰을 편안하게 해주었고, 마음이 편안해지니 자연 말하고 싶은 욕망도 스러지게 된 것.

밖으로 내닫던 의식을 안으로 되돌림으로써 나의 진정한 실체를 바라보는 눈을 뜨게 하려는 것이 참선이라던가, 그러나 며칠간에 깨달음에 이를 수는 없는 것이고 다만 묵언으로 고여지는 내 안뜰의 맑은 연못 물에 귀와 눈과 의식이 얼마쯤은 정갈해지는 듯, 그만으로도 일없는 한가[無事閑]의 기쁨을 조금은 맛볼 수 있었다. 간간이 뜻모를 눈물이 잔잔하게 솟아오를 때 가슴은 맑은 슬픔으로 채워지는 것이었다. 그것은 슬픔이 아니라 분명 환희였다.

파르스름한 새벽과 고요가 묻어나는 저녁, 산사의 새벽과 저녁은 지그시 가슴을 짓누르는 침잠(沈潛)과 청정(淸淨) 그 자체다. 저녁 예불을 기다리는 어둠 속에는 만상이 편히 쉬는 휴식이 있다. 소쩍새 울음이 종 소리에 이어지면 산사의 밤은 깊은 잠에 든다. 그리고 다시 새벽, 별은 쏟아져 내릴 듯 총총한데 동쪽 계곡 노송 가지에 어렴풋이 걸려 있는 하현달이 뒷꼍을 흐르는 물 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고요한 새벽을 지키고 있다.

이때만큼은 유정(有情) 무정(無情)에 대한 분별심이 사라지고 모두가 평등한 존재들로 너와 나, 시비선악의 개념이 무의미해진다. 온 세상이 말 없는 가운데 이들 두두물물(頭頭物物)이 가득가득 선열(禪悅)로 충만한 듯하다. 무언의 설법인가, 온 세상을 뒤흔들고 남을 우렁찬 침묵의 언어가 온 법계(法界)에 흐르는 듯 장엄하다. 우주는 말이 없는 것일까. 응당 말이 필요없을 것이다. 인간의 말만큼 교활하고 혼탁한 게 또 어디 있을까. 이 순간 나는 차라리 만고에 무정한 돌에 부끄러웠다.

 

나는 말 잘하는 사람이기보다는 말이 없는 사람이고 싶다. 지혜의 달빛이 선명히 내비칠 수 있도록 마음의 못[淵]을 맑게 채우고 고요히 가라앉히고 싶다. 내 지금은 어쩔 수 없이 말을 해야 하는 삶을 살고 있으나 언젠가는 말없이 그저 담연(湛然)한 나이고 싶다. 그렇게 살다가 영원한 침묵, 말없는 세계에 들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