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지 마세요

                                                                                               이오라(이옥란)

 초청을 받진 않았지만 평소 내가 존경해온 교장선생님의 퇴임식이기에 참석했다. 그 교장선생님은 나를 보더니 초청장을 많이 보내지 않기로 했노라고 미안해 하면서도 매우 반가워했다. 알음알음으로 온 많은 사람들이 모두 그분의 퇴임을 두고 아쉽다는 말들을 아끼지 않고 있었다.

교단을 떠나는 그분을 두고 교육계의 큰 손실이라고 아쉬워하는 그런 분위기 속에서 내가 느낀 것은 이런 분이야말로 그 경륜과 인품에 걸맞는 대접을 받을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근래 경제 위기를 맞아 도처에서 감원바람이 불어닥쳤던 때에 교단에서도 정년 단축이 시행되었다. 그래서일까, 정년 단축으로 교단을 떠나게 된 많은 나이든 교원들이 존경의 대상이 되어야 할 텐데도 마치 무력한 퇴역 장군처럼 쓸쓸한 존재로 비치는 것 같아 안타깝다.

이런 삭막한 세태이기에 훌륭한 그 교장선생님이 더 오래 교육계에 남아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한지도 모르겠다. 더구나 직접적인 이해관계에 있지도 않은 사람들까지 그분의 떠남을 아쉬워하는 것을 보면서 나는 사람이 진정으로 존경을 받는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새삼스레 생각했다.

업무 능력이나 학식이 높은 것도 존경의 대상이 되겠지만 무엇보다 그분이 갖춘 인품이나 인생의 멋을 아는 그 마음의 여유로움이 사람들에게 나이와 상관없이 존경심을 일으키게 한다는 생각이다.

실제로 고령에도 불구하고 젊은이들 못지않은 열정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분들이 많다. 얼마 전 나는 모대학 명예교수로 계신 철학자 한 분을 뵌 적이 있다. 그분 역시 정년 후에도 왕성하게 학문 연구와 뜻있는 일들을 하고 계시며, 많은 사람들이 그분의 학식과 인품을 존경하여 따르고 있다.

그 자리에 함께 있던 한 분이 ‘김선생님은 너무 꼿꼿하셔서…, 천상 이 시대의 마지막 선비지 뭐” 하며 불만 아닌 불만으로 그 존경심을 나타냈다.

그분과 잠시 대화를 나누는 동안 나는 문득 ‘이분은 꼭 오래 사셔야 하는데’ 하는 생각을 했다. 그분이 좀더 젊었더라면 후학들에게 더 오래 많은 가르침을 줄 수 있을 텐데 하는 바람과 그 아쉬움이었을 것이다.

인품이 고매하거나 착하고 좋은 사람들을 매스컴에서 보게 되면 나는 ‘저런 사람은 오래 살아야 하는데’ 하고 생각하는 버릇이 있다. 그분들에 대한 내 나름의 찬사인 셈이다.

좀 심한 말같지만, 매일 전해져 오는 부고장을 대하면서 사람들이 ‘이분은 꼭 더 오래 사셔야 했는데’라고 진정으로 그 죽음을 아쉬워할 만한 그런 사람이 얼마나 될 것인가. 나이 많은 부모의 죽음도 ‘호상’이란 말로 그 슬픔을 얼버무리는 세상에, 남들이 다 떠나는 직장을 떠난다고 해서 그 떠남을 아쉬워한다는 일은 그리 흔한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러기에 그 교장선생님의 퇴임을 아쉬워하는 그 분위기의 의미가 더욱 새삼스럽게 다가오는지도 모르겠다.

나이 먹는 일이 그 어느 때보다 서럽고 무섭다는 얘기들을 많이 한다. IMF가 몰고온 한파는 교육계에도 정년 단축이란 거센 바람으로 불어닥쳤다. 교육계에도 경제 원리에 의한 구조조정이 적용되어 아무리 경륜 있고 능력 있는 사람이라도 나이가 많으면 반드시 퇴출돼야 한다는 위기감을 낳았다.

급증하는 실업자와 최악의 취업난 때문에 세대 교체 바람이 일어나는 것이 한편으로는 이해가 된다. 그러나 그런 생존 위기가 경륜을 높이 사던 우리의 가치관까지 바꿔놓는 것은 아닌지 겁난다. 그 연륜과 인품에 의해서만 보여 줄 수 있는 인성교육이 가벼이 다뤄지는 것 같은 이 수상한 바람이 아무래도 위험하다는 생각이다. 정보와 기능 위주의 사회는 생산 능력을 가속화하고, 세상을 빠르게 변화시켜서 젊은 세대들에게는 매력적일지는 몰라도 자칫 최소의 생존 가치만이 팽배해질까 걱정스럽기 때문이다.

그러한 제품 생산의 경제 원리로 사람의 능력을 재는 것은 신판 고려장 풍조를 낳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전통적 가치관이나 정신 문화는 정보 시대의 참을성 없는 젊은이들에게는 더 이상 매력적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인품이니 경륜이니 하는 그 가치 기준이 하루 아침에 낡은 것으로 치부되는 이 사회에서 어린이들이 보고 생각할 것은 너무나 뻔한 것이다.

이제 원점에서 다시 생각할 일이다. 우리들 정신의 지주는 컴퓨터도 사이버 인간도 복제 인간도 아니라는, 그 생각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88`올림픽 이후 급성장한 우리 경제가 10년만에 IMF 환란에 빠진 것이 도덕의 해이에서 비롯되었다는 한 분석 결과가 의미 심장하다. 다 함께 행복하게 사는 평화롭고 안정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흐트러진 우리의 가치관부터 바로잡는 것이 앞서야 할 것이다.

내 주위에는 연륜을 쌓아 지혜와 능력이 있고 고매한 인품과 멋을 아울러 갖추고 있는 분들이 많다. “제발 떠나지 마세요”라고 말할 그런 분들이 내 곁에 아직 많다는 사실은 혼란한 이 시대에 하나의 희망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분들을 보면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그 마음의 심지를 세울 수 있기 때문이다.

 

 

 

이오라

계간수필로 등단(97년).

인천 제물포고등학교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