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읍내 시째

                                                                                             김수봉

 나 어릴 적 우리 읍내에는 ‘시째’라는 사람이 있었지. 언제든 버스 정류장에만 가면 볼 수 있던, 아주 작달막한 키에 허름한 옷만 걸치고 헤벌죽 웃고 섰는 그 사내, 보통 사람의 눈으로 보면 참 못나기도 한 인물, 다섯 자도 못되는 키에 다리는 왜 그리도 짧았던지, 난쟁이를 겨우 면할 정도였지.

늘 찐죽찐죽한 눈에 조금 합죽한 입이 ‘헤~’ 웃는 상호라니, 웃을 때 누런 이가 온통 드러나는 그는 영락없는 바보였지. 저 자신이 바보인 줄 모르고 사는 사람들의 눈엔 더더욱 바보였지. 한 번도 남을 속여보진 못하고, 누구의 말이든 믿기만 할 것 같은 사람. 사는 집이 어디인지, 가족은 있는지, 아는 사람이 우리 읍내에는 있었겠지만 내 귀엔 들린 바 없고, 시째는 그저 정류장 시째일 뿐이었지.

정류장에서 그 앞을 지나면 인사 반 놀림 반으로 “시째, 시째” 불러도 어른 아이 가리지 않고 헤헤 웃어주던 시째.

시째는 나이가 없었지. 서른 살이라고도 하고 스물 살이라고도 하고 수염이 텁수룩 자란 때는 마흔 살이라고도 했지만, 정확한 나이는 아무도 몰라 누구나 시째, 시째 임의롭게 불렀고, 그도 또한 어른 아이 구별 없이 “응, 응~ 그려 그려” 반말로 대꾸하는 것이 우리 읍내에서는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었지. 그러나 간혹 철부지 아이들이 “시째야!” 하고 놀릴 때면 나이 듬직한 어른들이 “에끼놈!” 하고 호통치는 것을 보면 나이가 들긴 들었었던 게지.

시째의 태생이 우리 읍내인지 어디서 흘러들었는지, 6·25와 4·19와 5·16의 시끄러운 세상을 다들 제 코앞만 보며 살아오던 사람들은 알 턱이 없었고 관심도 없었지. 다만 시째가 우리 읍내를 떠나 본 적이 없고, 다른 곳에 가면 못살 줄만 안다고 믿을 만큼 십 년도 넘고 이십 년도 넘게 그렇게, 또 그렇게 살고 있었으니 그는 언제나 우리 읍내 시째일 수밖에 없었지.

직업이 일정치 않으니 정류장에서는 리어카꾼이었고, 작은 공사판에선 날품팔이, 리어카에 짐을 싣고 읍내 거리를 지나갈 때면 낯익은 사람들이 “시째, 돈 벌었구나” 하면 “그려, 그려” 하면서 또 웃었지.

마땅한 일거리가 없는 한겨울이나 살얼음 낀 이른 봄에는 어레미를 들고 나가 개울이나 연못을 훑어서 잡은 물천어[川漁]를 한 사발씩 들고 와서 사라고도 하지만, 시째가 제일 신바람나서 하던 일, 읍내 아이들도 덩달아 좋아했던 일은 극장 선전이었지.

“둥둥, 품빠라빠 품빠라빠, 둥둥~.”

얇은 널빤지에 붙인 영화 포스터가 시째의 등짝과 가슴에 걸려 있고, 커다란 북을 치며 읍내 거리를 누비는 날, 머리에는 또 어디서 얻었는지 피에로 모자 같은 것도 쓰고, 종이 메가폰으로는 연방 입나팔을 불어댔었지.

“품빠라빠 품빠라빠, 둥둥~.”

북장단 입나팔 소리에 발맞춰 휘뚝거리며 걷는 시째의 폼은 우리 읍내 진풍경 중의 하나였지.

이른바 ‘길거리 선전’으로 그때 우리가 ‘샌드위치 맨’이라고 불렀던 선전원인 셈인데, 얻어 신은 커다란 신발과 헐렁하고 긴 바지는 아직 한 번도 본 적인 없는 채플린 영화의 한 장면을 연상하게 했었지.

시째가 이런 모습으로 지나갈 때, 사람들은 모두 한 번쯤 뒤돌아 보았고, 아이들은 어쩌다 찾아오는 서커스의 나팔 소리를 듣는 것만큼이나 신이 나서 줄줄이 따라 다니곤 했었지. 시째 자신도 노상 하는 일은 아니고 가끔씩 극장의 부탁을 받아서 하는 일이었기에 수입보다 그 자체에 자랑과 즐거움을 더 가진 듯, 그만큼 그는 읍내의 ‘인기 맨(?)’이었고 그 인기를 극장이 적당히 이용했던 거지.

언제나 그의 얼굴에는 화난 모습이 없었지. 그의 가슴에도 속상한 일, 부아터질 일이 왜 없었을까만 낮에는 늘 그렇게 웃고, 화는 집에 가서 혼자만 냈던 건지. 그의 집도 가족도 모르는 읍내 사람들은 짐작을 할 뿐이었지.

그가 없는 자리에서도 시째는 읍내 사람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렸지. 한파가 몰아치는 겨울 밤에는 뜨끈한 아랫목에 앉아 시째 걱정을 했고, 설설 끓는 잔칫집 가마솥 앞에서는 국물 한 그릇 먹이고 싶다는 사람들도 많았지. 그저 입 인심이 아니라 돈이라도 내고 사 주고 싶다고 했었지.

그 시째 얘기가 읍내의 미담으로 남은 일도 있었으니.

어느 날은 버스에서 내린 어떤 손님이 커다란 보퉁이 하나를 잊고 갔는데 한 나절이 지나도 주인이 나타나지 않아, 시째가 그 보퉁이를 자기 리어카에 실었지. 그걸 본 정류장 사람이 “시째, 오늘 수지맞았구나” 하자, 시째는 눈이 똥그래져서 한참을 노려보고 섰다가 그냥 싣고 갔지.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일찍 그 보퉁이를 다시 싣고 나와서는 어제 보퉁이가 놓였던 자리에 놔두고 지키는 것이었지. 다른 사람의 짐 나르는 일은 할 생각도 않고 기다렸지.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내가 학교를 마치고 객지에서 직장생활을 하다가 명절 같은 때의 귀향길에서 정류장에 내리면 꼭 버릇처럼 두리번거려지는 것도 시째를 보기 위해서였지. 그때마다 그는 거의 거기 있었고, 내가 그를 발견하기 전에 그가 먼저 나를 알아보는 일이 많았지. 여전히 그는 헤~ 하고 웃었고, 내 인사말에 그려, 그려를 아끼지 않았지.

어느 핸가 내가 말을 높여 “안녕하셨어요” 했을 때는 손을 내저으면서 어느 때보다도 크게 입을 벌리고 웃었지. 그 누런 이와 잇몸까지를 다 드러내면서…….

세월이 더 흘러 내 머리가 희끗거리고도 한참이 지난 어느 해의 귀향길에서 나는 시째를 볼 수가 없었지. 그냥 자리가 어긋졌거니 했는데, 그 뒤로도 계속 그가 보이지 않았지. 읍내에 붙박고 사는 친구들에게 물어봐도 “글쎄, 보이지 않더라고” 하는 무성의한 대답뿐.

 

우리 읍내가 커지면서 정류장도 대형화되어 옮겨지고 사람들은 더 많이 오가고 있는데 아무리 두리번거려 봐도 시째의 모습은 없었지.

보퉁이를 지키고 서 있는 시째가, 나의 인사말에 손사래를 치며 헤벌죽 웃던 시째의 얼굴이, 더욱 더욱 보고 싶어지는데 지금은 빤질빤질하고 날래어 보이는 사람들만 우리 읍내 정류장 대합실을 번듯번듯 오가고 있지. 시째 같은 사람을 주저없이 바보로 보아 넘기는 그런 사람들만 오가고 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