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집

                                                                                           김정선

 아무리 가고 또 가도 다시 가고 싶은 곳.

사방이 바다에 둘러싸여 이국적인 정취가 물씬 풍기는 제주도에 우리 아버지의 집이 있다. 내가 자라고, 사춘기 시절을 보내고, 내 부모님이 눈을 감으신 집이다.

50여 년 전 내가 초등학교 시절, 밤이면 아버지와 어머니의 대화에는 늘 새로 짓는 집이 화제로 등장하곤 했다.

두 분은 당신의 자식들을 키우는데 모자람이 없는 집을 지으시기 위해 많은 날들을 함께 의논하며 준비하시더니 할아버지께 물려받은 묵은 집을 헐어내고 그 터에 다시 단층 양옥집을 짓기 시작했다. 제비가 둥지를 만들기 위해 짚과 진흙을 섞어 그 작은 입부리로 날라 처마 밑에 자기들의 둥지를 틀듯, 나의 친정집도 아버지와 어머니의 마음과 정성이 모여져서 지어지고 완성되어 갔다.

우리 가족은 집이 지어질 동안 뒷채에 살게 되었다. 아버지가 집을 짓기 위해 몇 년 동안 계획을 세우며 미리 미리 사다가 헛간에서 말려두었던 재목들이 하나씩 하나씩 목수들의 대패질에 의해 기둥으로 세워지면서 집의 외관이 나타나는 모습이 신기하기만 했다.

어린 나는 집이 지어지는 동안 그 주위를 맴돌며 신기한 듯 바라보고 또 바라보았다. 위험하다며 저리 가라는 어머니의 성화를 들으면서……. 그럴 때면 나는 ‘정말 저 집이 지어지나’, ‘언제 다 지어져서 우리가 뒷채 생활을 끝내고 들어가게 될까’ 하고 몇 번이나 생각하곤 했다.

아버지가 퇴근 후, 집에 오시면 집짓는 광경을 보면서 여기는 부엌, 저기는 아이들 방, 여기는 마루라고 설명을 하셔도 마치 꿈을 꾸듯 신기루처럼 여겨지기만 했다. 집이 거의 지어질 무렵, 아버지는 식구들과 목수들이 모인 앞에서 새 집이 탈없이 마무리되고 식구들의 복을 비는 상량식을 하셨다.

상량식이 끝난 후, 기다렸다는 듯이 산만의 연속이던 시간들이 서서히 정리되고 집은 재빠르게 완성되어 갔다. 황토흙과 짚을 짓이겨 바른 방바닥에는 노란 장판지가 붙여진 후, 한참을 말리고 나서 들기름이 발라졌다.

현관 문과 마루 문에는 하얀 칠이 칠해졌다. 인고의 시간을 거쳐 우리 가족이 몸 담을 한 채의 집을 완성했을 때에 아버지는 희열과도 같은 감정을 느꼈으리라. 당신의 취향대로 집안 구석구석을 꾸며 나가시느라 아침 저녁으로 잠시도 쉴 틈이 없으셨다. 앞마당에는 동백나무와 종려나무 등 온갖 식물들이 심어진 정원이 꾸며졌고, 뒷마당에는 어린 감귤나무들이 심어졌다. 아버지는 그 나무들을 한 해, 두 해 키워나갔고,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늘 바쁘셨다.

우리들의 스웨터를 뜨개질하셔야 했고, 뒷마당에서 먹돌로 소라껍질을 깨어 오이를 섞어 만든 새콤한 소라 냉국을 상에 올려야 했고, 자리돔 젖도 담가야 했다. 그리고 어쩌다 전복회를 상에 올리기도 했다. 그런 날이면 둥근 밥상에 둘러앉은 어린 동생들의 젓가락 소리가 요란해지곤 했다. 그렇게 항상 시끌벅적하고 소란스럽던 친정집, 명절 때면 어머니의 손맛이 어우러진 음식 냄새가 집안 가득 번지고, 장독대 항아리들은 햇살 아래서 갖가지 장들을 익혀내던 집이었다.

그러나 그 집에 고즈넉한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어머니께서 한창 젊으신 나이에 돌아가시면서부터다. 퇴근 후에 아버지가 뒷마당에서 꽃을 가꾸시는 시간은 더더욱 길어지셨고, 우리 형제들은 어느 새 아무리 웃어도 어색해 보이는 아버지의 얼굴 표정에 익숙해져야만 했다. 나무를 손질하시던 그 손길에도 아픔이 맺혀 있으리란 생각은 그때 나는 미처 헤아리지 못했다.

그때부터 아버지는 한 가지 취미가 더 생겼다. 밤이면 결이 곱고 자그마한 나무판에 먹지를 덮고 글을 새긴 다음에 칼을 들고 글자의 획을 따라 한 자 한자 정성스레 파고 깎아내는 일이다. 글이 새겨지면 아버지는 글자의 획을 따라 까만 칠을 하고 당신의 이름과 시암(枾庵)이라는 호를 새겨서 친구들에게 선물하시곤 했다.

그 후 5년 뒤에 아버지는 주위의 권고로 새 아내를 맞아들이셨다. 다시 몇 년 후 나는 결혼하고 서울로 올라왔고, 그 집을 친정집이라 부르게 되었다.

그리고 언젠가는 나이가 더 드시고 정년퇴직 하신 후, 여유 있고 너그러우신 할아버지의 모습으로 변하여 앞마당, 뒷마당을 오가시며 나뭇가지도 치시고 꽃에 물도 주시며 노후를 보내는 아버지를 상상하면 늘 마음이 행복해지곤 하였다. 아버지가 평생에 지은 한 채의 집은 내 영혼의 고향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아버지가 혈압으로 쓰러지셨다는 전화를 받고 급히 비행기를 탔다. 병원에 도착하니, 아버지는 입원실에 모셔져 이미 가망없다는 의사의 진단이 내려져 있었다. 오빠는 아버지를 급히 집으로 모셨다.

일생을 성실하고 근면하고 남에게 모진 소리 한 번 안하시며 청렴결백하게 공무원 생활을 하셨던 아버지셨다. 한창 젊었던 시절, 5·16 군사혁명이 일어난 직후, 제주시와 서귀포 사이에 한라산을 뚫고 횡단도로를 만들 때는 모자를 쓰고 농구화를 신은 작업복 차림으로 산 중턱의 현장에서 일꾼들과 같이 일을 하시며, 우리 형제들의 큰 자랑이 되어주시던 아버지가 아니었던가. 나는 아버지가 오래오래 사시면서 우리들의 힘이 되고 세상 근심을 덮어주는 큰 거목이 되어 주실 줄만 알았다. 그런데 겨우 60을 넘기신 의식불명의 몸으로 누워 계시는 아버지의 모습은 상상도 못했던 일이었다. 당신이 나무 하나, 기와 하나까지도 사고 모아서 지으신 집은 당당하게 그 터를 지키고 있고, 아버지가 손수 심으셨던 어린 나무들은 고목이 되어 지붕 위를 넘어 하늘이 높다 않고 자라고 있는데…….

아버지는 당신이 그렇게도 아끼시던 집에서 쓰러지신 지 3일만에 이 세상과 영원한 이별을 하셨다. 이제 아버지 떠나신 지 15년이라는 세월이 지났고, 아버지의 집은 50여 년이라는 긴 연륜을 맞이했다. 자주는 못 가는 아버지의 집, 그러나 어쩌다 가게 될 때면 골목에 들어설 때부터 가슴이 뿌듯하고 뭉클해지는 뜨거운 기운을 느끼면서 마음이 설레인다.

지금 이 하늘 아래에서는 그 어디서도 뵐 수 없는 아버지, 어머니, 그러나 대문에 서면 나는 그분들을 뵙게 된다. 지금은 가신 아버지를 대신하여 오빠가 여전히 이 구석 저 구석을 다듬으며 아끼는 집이, 젊은날 내가 꿈꾸던 노년의 아버지처럼 너그러운 모습으로 나를 맞아들이기 때문이다.

오십대 중반인 내가, 부모님의 따뜻한 품안으로 되돌아와 보호받는 듯한 기분이 든다. 지나간 세월의 흐름 속에 우리 부모와 형제들의 모든 기쁨과 슬픔이 배어 젖어 있는 곳, 언제나 돌아가고 싶은 어린 시절의 내가 되어 나는 오늘도 가고 싶다. 아버지의 집으로…….

 

 

 

김정선

수필문학으로 등단(89년).

수필집 "파도 위의 하얀 길", "골프처요? 드라이브해요?"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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