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안개

                                                                                            김희재

 원고가 잘 되지 않아 쓰기를 포기하고 채팅방에 가서 사람들과 어울려 노는 밤은 속절없이 빨리도 지나간다. 밤이 새는 줄도 모르고 컴퓨터에 매달려 쉴새없이 자판을 두드리며 모니터 위로 떠오르는 활자만 들여다 보다 문득 창 밖을 내다보니 바깥 풍경은 간 데 없고 희뿌연 안개만 자욱했다. 창문을 여니 서늘한 기운이 확 끼치며 미세하고 고운 하얀 입자들이 마치 기다리고 있던 양 무작정 방안으로 스며들었다. 아무것도 분간을 할 수 없는 짙은 운무에 덮여 촉수 높은 가로등조차 말갛게 씻겨 빛이 바랜, 그 아뜩하도록 자욱한 속에 집과 나무와 산과 하늘 그리고 사람들이 묻혀 있었다. 지척을 분간하기도 힘든 안개 속에서 그 모든 것들은 일상의 굴레를 벗고 익명의 자유로움을 만끽하고 있는 듯이 보였다.

컴퓨터에다 이름 석 자와 주민등록번호만 적어넣으면 신상에 대한 모든 정보가 줄줄이 쏟아져나오는 세상에 살면서 자기를 있는 대로 다 드러내지 않고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아슬아슬한 자유로움인가! 나는 가끔 내 속에 감추어진 나로 존재하고픈 충동을 느낀다. 모든 사람들의 기억 속에 각인되어 있는 극히 제한된 내 이미지가 아닌 본질적으로 새로운 나를 받아 줄 것 같은 기대를 갖고 말이다. 그러나 안개 속에서 느끼는 익명의 자유로움은 햇살이 확 퍼지는 순간 간데 없이 사려져 버리고 마는 허망한 것이었다. 어쩌면 그것은 17인치 모니터 안에서 온 세상에 흩어져 있는 온갖 사람들과 만났다가는 스위치만 끄면 일순간에 모든 것이 홀연히 사라져 버리고 마는 사이버 공간의 허망한 자유와 참 많이도 닮았다.

작년 가을부터 나는 아이들 어깨 너머로 인터넷을 배웠다. 처음엔 그저 E-메일 주소를 만들어 메일이나 주고받고, 아들의 대학 진학에 필요한 정보나 얻으러 돌아다닌 게 고작이었다. 그러던 것이 조금씩 컴퓨터와 친해지면서 좋아하는 음악 사이트에 가서 다운받아 들을 줄도 알게 되고, 채팅을 하며 사람들과 밤새워 놀 줄도 알게 되었다. 채팅은 모니터에 글자를 쳐 올려서 대화를 하는 것인데 소리로 듣는 것과는 다른 아주 신비한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채팅을 할 때는 이름도 본명도 아닌 애칭을 쓰며 굳이 자기를 있는 그대로 다 밝히지 않아도 되었다. 나이도 직업도 성별까지도 본인이 마음 내키는 대로 지어낼 수 있는 익명성이 보장된 사이버 공간에서 사람들과 대화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은 내게 새로운 경험이었다.

채팅은 n세대의 전유물이라 여겨 아예 시도조차 않던 내가 한 번 맛을 들이고 나니 밤이 새는 줄도 모르고 빠져들게 되었다. 사이버 공간에서는 필요 이상으로 체면치레를 하지 않아도 되었고, 마음에 없는 인사치레를 하지 않아도 아무 문제가 없었다. 그저 내 마음이 흘러가는 대로 자판을 두들기며 혼자 웃고 고개를 끄덕거리기만 하면 되었다. 모니터를 사이에 두고 있으면서도 서로 보이지 않으니 화장을 하지 않은 얼굴에다 잠옷을 입고서도 아주 자연스럽게 사람들과 어울려 떠들 수 있고, 내 집 거실에 앉아서 미국, 중국, 유럽에 사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어서 더욱 신이 났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기본의 문법이나 어법을 무시한 특유의 신조어를 배우는 것도 내가 젊은 세대와 호흡을 함께 하는 깨인 사람이라는 자부심을 갖게 해 주었다. 방가방가(반가워요), 어솨여(어서 와요), 만(미안해요), 리히이(다시 안녕), 글게요(그러게요), 글쿠나(그렇구나), 번개(채팅하다 맘에 들면 약속해서 만나는 것), 지딩(직장인), 몰딩(직장에서 몰래 채팅), 고딩, 중딩, 대딩 등 컴퓨터 밖에서는 듣도 보도 못하던 어휘들을 나도 서슴없이 쓰게 되면서 고등학생 아들의 세계를 더 이해할 수 있어서 좋았다.

게다가 나는 유난히 상상력이 발달했는지 모니터에 뜨는 문장만 보고도 상대방의 외모나 성격은 물론 목소리, 어투까지 다 내 나름대로 완벽하게 조합을 해냈다. 상대방 역시 내 실체와는 상관이 없이 단지 내가 쳐서 올리는 글자만 가지고 자기 맘대로 내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것 같았다. 비교적 타이핑이 빠르고 말쟁이답게 순발력 있게 대답을 하는 덕에 사람들은 나를 실제 나이보다 훨씬 젊고 예쁜 여자로 상상을 해 주었다. 그 덕분에 채팅은 정말로 내게 즐거움을 주는 놀이가 되었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몇 번이나 ‘들빛’, ‘사슴’, ‘야호’, ‘롱-텀’, ‘바다’, ‘진주’, ‘초이스’, ‘가을’, ‘로즈’ 등의 애칭을 쓰는 사람들이 오는 방에 들러 서로의 안부를 묻고 좋아하는 음악을 몇 곡 청해서 들으며 머리를 식히고 왔다. 굳이 신상에 대해 다 알려고 애쓰지 않고도 자연스레 친구가 되는 그들과 함께 있으면 시간도 잘 가고 재미도 있다. 하지만 내게 있어 그들은 마치 아침 햇살이 확 퍼지고 나면 순식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마는 새벽 안개처럼 영원히 컴퓨터 속에서만 살아 움직이는 존재들이다. 거기는 컴퓨터를 끄는 순간 아무런 흔적 없이 사라지고 마는 가상현실의 세계일 뿐이니까 말이다.

허나, 사실 따지고 보면 이 세상에 무엇 하나 안개 같지 않은 것이 있을까? 어쩌면 내가 진짜 현실이라 믿고 있는 이 시간과 공간이 바로 허망하게 사라져 가는 아침 안개는 아닐는지 모르겠다.

 

 

 

김희재

계간 수필로 등단(98년).

대전 YMCA 어학아카데미 부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