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상

                                                                                        朴在植

 우리 나라 김대중 대통령에게 노벨 평화상이 주어졌다. 참으로 반갑고 대견한 일이다.

알다시피 노벨상은 평화상 외에도 물리, 화학 등 5개 부문의 상이 더 있고, 이 부문들의 활동을 통해 ‘인류의 복지에 가장 구체적으로 공헌한 자’에게 주는 세계적인 상이다. 따라서 이 상을 받은 것은 비단 개인적인 영예나 한 국가, 민족의 경사라는 차원을 넘어, 전 인류의 이상과 희망의 상징으로 기림을 받는 표적이 된다는 점에서 여느 상보다 매우 의미가 크고 값지다 할 것이다. 물론 상금도 만만치가 않다.

그런데 해마다 주어지는 이 대단한 상이, 우리네 문학하는 사람들에게는 뭐니뭐니 해도 문학상에 관심이 쏠릴 수밖에 없다. 지난 세기의 50년대 초엽, 서울 종로 네거리 근처의 어느 다방에서 당시의 문단을 주름잡던 작가 몇 분이 만나 객담을 나누는 자리에 우연히 합석한 일이 있다. 그 자리에는 내가 사사하던 계용묵 선생과 작품을 통해 경외하여 마지않던 김동리 선생, 그리고 두세 사람의 작가가 동석했는데 그 중에 신인으로 갓 등단한 『혈서』와 『비오는 날』의 작가 손창섭 씨의 을씨년스런 얼굴도 끼어 있었던 것이 인상에 깊다. 그는 그가 살고 있는 변두리 판잣집에서 양계로 호구를 꾀하는데 닭이 돌림의 콧병에 걸려 다 죽고 몇 마리밖엔 남지 않았다며 암담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 사이에 오간 대화는 대개 이런 따위의 궁상낀 근황에 관한 것이었고, 계선생을 뵈러 들렀던 백면의 문학 청년인 나는 국천 척지의 자세로 말석에 앉아 하릴없이 그것을 엿듣고 있었다. 그러자 김동리 선생이 “거 참, 처칠 같은 정치가한테도 주는 상인데, 그 놈의 노벨 문학상이라도 타면 허리가 좀 펴겠는데” 하고, 쩝쩝 입맛을 다시는 것이었다. 아득한 소망을 객담에 빙자하여 뇌까려 본 말일 터인데도 말끝에 흘린 선생의 쓸쓸한 웃음이 소소리바람처럼 스산한 느낌으로 와닿았다.

그 다방이 있던 건물의 바로 곁에는 불에 타다 남은 을유문화사(乙酉文化社)의 사옥이 폐허 속에 해골처럼 서 있던 전후의 암울한 시절의 이야기이다.

그 김선생의 소설 『을화』가 한때 노벨 문학상의 물망에 오른 것은 훨씬 뒤의 일이고, 선생의 지체나 터수가 그 탐스러운 상금에 입맛을 다시지 않아도 될 무렵의 일이다.

그러나 ‘노벨상’ 하면 그래도 가장 큰 관심의 대상이 되는 상은 평화상이 아닐 수 없다. 왜냐면 이 위대한 상을 남기고 죽은 노벨의 근본의 뜻이 ‘평화’에 있었기 때문이다.

다 아는 얘기지만 노벨상은 스웨덴의 발명가 노벨의 유지와 유산을 밑천으로 운영되는 상이다.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하여 큰 부자가 된 노벨은 유언을 통해 그 막대한 유산을 사랑하는 자손에게 물려주지 않고 ‘인류의 복지에 기여하는 일’에 써달라고 송두리째 내어 놓은 것이다.

왜 그랬을까? 인류에 속죄하는 뜻에서라고 한다. 그가 인류의 복지를 위해 산업 개발용으로 고안한 다이너마이트가 엉뚱하게도 전쟁에서 대량 살육의 무기로 악용되는 데에 아연 죄책감을 느낀 것이다. 무기로 고안한 미사일이 우주 개발에 이용되는 경우와는 정반대의 현상인데, 이렇게 동기와 결과가 빚어내는 부조리는 인간 범사의 어쩔 수 없는 조화(造化)라고 할밖에 없다.

그래서 노벨은 생각했을 것이다. 이 세상에서 전쟁만 없으면 인류의 과학 문명은 오로지 인간의 행복과 이익을 위해 본래의 제 구실을 할 수가 있다. 그러자면 그 끔찍한 폭발물의 발명으로 치부한 돈은 마땅히 이 이상을 실현하는 일에 쓰는 길밖에 없다, 하는 갸륵한 깨달음에서 생전에 이룬 정재를 인류의 몫으로 환원시킨 것이다. 국민의 혈세를 밑천으로 졸부가 된 우리의 재벌들이 나라의 경제를 누란 지경에 빠트리고도 빼돌린 재산을 움켜쥐고 늘어지는 행태와는 사뭇 다르다.

이런 내력으로 마련된 상인 만큼 노벨상의 본뜻과 진면목이 평화상에 있다 해도 과언은 아닐 듯하다. 이 뜻있는 상이 우리 나라 정치 지도자에게 돌아왔으니 얼마나 반갑고 대견한 일인가. 비단 눈도장용의 신문 광고를 통해 떠벌이는 아부성 축하가 아니더라도 우리 국민 모두가 마음으로 경하하여 마지않을 일이다.

그런데 잔칫집에 말이 많다고나 할까. 우리의 이 경사에 약간의 해프닝성 말썽도 없지 않았다. 즉 수상 소감을 묻는 외신 기자의 질문에 당사자인 대통령께서 “북한의 김정일 위원장과 함께 받았으면 좋았을 걸, 혼자 받기가 미안하다”고 한 말이 한때의 시빗거리가 된 것이 그것이다. “KAL기 폭파 사건 등 세계가 다 아는 테러 범죄의 주도자에게 평화상이 가당한 일이냐?”는 것이었다.

물론 김대통령의 속내는 그걸 모르고 하신 말씀은 아닐 것이다. 알다시피 그가 이번에 평화상을 타게 된 것은 그 동안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애쓴 보람도 컸지만, 그보다도 결정타의 구실을 한 것은 그의 노하우로 추진하여 거둔 ‘햇볕정책’의 성과에 있었다. 때마침 뜬금없던 정상회담이 성사되어 남북한에 얽힌 갈등의 실마리를 푸는 6·15 공동선언이 발표되고, 뒤미처 맛보기에 불과하기는 하나 50년을 헤어져 살던 이산가족이 만나 눈물로 얼싸안는 감격스런 신이 펼쳐졌으니, 이것은 분명코 세계의 화약고 한반도에 일촉 즉발의 뇌관이 제거되는 길조가 아닐 수 없다. 미상불 지금 경의선의 복구를 위해 꽁꽁 묻어두었던 지뢰를 걷어내고 있지 않은가, 하고 평화를 가늠하는 노벨상의 잣대가 평가를 한 것이다.

자, 그렇다면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법인데, 서로 죽이 맞아서 실마리를 푼 북쪽의 파트너 김정일 위원장에 대한 처우는 어떻게 할 것인가? 그에게도 평화상이 주어져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또 그래야만 상값을 하느라고 모처럼 잡힌 화해의 고삐를 놓지 않고 아직은 앞이 먼 평화 통일의 길을 신이 나서 따라 나설 일이 아니겠는가, 하는 충정에서 우러난 생각일 터이다. 어쩌면 그것은 평화와 통일을 소망하는 우리 겨레 모두의 은근하고도 간곡한 생각일지 모른다.

하지만 어찌하랴. 나의 충정만큼은 절실하지 못한 것이 세상사 물정임이 안타까울 뿐인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