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선(次善)의 삶

                                                                                                       엄정식

 나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최선을 다하라’는 말을 무척이나 많이 들어온 것 같다. 학교에서는 선생님들로부터, 집에서는 부모님들이나 다른 식구들로부터, 직장에서는 상관이나 동료들로부터 어떤 상황에서 무슨 일을 하든지 항상 최선을 다하라는 말을 들어왔다. 그래서 언제인가부터 나는 그것을 생활의 신조처럼 여기게 되었고, 학생들은 물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사람들에게 그러한 자세로 세상을 살아가도록 권장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심지어 모든 인류를 최선을 다해서 살아가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구분해서 생각해 보기도 하였다. 참으로 인간다운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을 그러한 식으로 구분했던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최선을 다하는 것만이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고 우리의 삶을 영원하게 만드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요즈음 나는 이 말에 대해서 다시 진지하게 생각해 보게 되었다. 우리가 살아가는 데 있어서 항상 최선을 다한다는 것이 가능하지도 않고 때로는 바람직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을 가질 때가 가끔 있는 것이다. 물론 자기가 처한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것을 다해 보려는 자세는 바람직하고, 그러므로 누구에게나 권장할 만한 일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러한 신념을 유일한 삶의 신조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기본 자세로 삼는 데에는 적어도 몇 가지 문제점이 있는 것이다.

우선 매사에 최선을 다한다는 것이 일종의 과장된 수사가 아니라면 실제로 실천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최선의 것을 실천에 옮기려면 우선 어떤 선택이 최선의 것이지를 알아야 하는데, 대부분의 경우 이것을 확인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일상적인 경험에 비추어 볼 때 행위의 결과를 보고 그의 선택을 평가하기 마련이고, 결과를 알고 선택한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는 고작해야 최선이라고 믿는 것을 실천에 옮길 수 있을 뿐이고, 그것도 여의치 않을 때가 많이 있는 것이다.

가령 대학을 졸업하고 유학의 길에 오르는 것이 지금 나로서는 최선의 길이라고 가정해 보자. 그러나 그것이 과연 나에게 최선의 길인가. 부양해야 할 식구가 있고 학비도 마련하지 못한 상황에서 더구나 자격 시험에는 계속 미달되고 입학 허가조차 받지 못하고 있는 형편인데 계속 유학을 시도해야 하는가. 정말 무슨 근거로 이러한 상황에서 유학의 길만이 최선이라고 판단을 하게 되었는가. 또 그것이 최선이라고 하더라도 실제로 나의 능력을 넘어서는 것이라면 결국 누구를 위한 최선이란 말인가. 그리하여 나와 상관이 없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나에게’ 최선의 길이라고 할 수 있는가.

이와같이 우리는 어떤 상황에 처해서 어떤 행동을 취하는 것이 최선인지 알 수 없는 경우가 많을 뿐 아니라 안다고 해도 실천에 옮기기 어려울 때가 적지 않은 것이다.

또한 어떤 사람이 항상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한다고 해서 그 사람 자신에게도 반드시 바람직하다고 볼 수도 없다. 가령 어떤 사람이 유학을 해서 천신만고로 학위를 받아서 훌륭한 학자가 되었다고 해 보자. 그러한 사람은 빛나는 업적을 남기고 다른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기도 하겠지만, 문제는 그가 항상 최선을 다해야 그러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는 점에 있다. 삶에 있어서 보석처럼 빛나는 여러 다른 가치들을 저버리고, 때로는 가족이나 친지들을 비롯하여 다른 사람들을 외면한 채 귀중한 시간을 한 가지에만 몰두할 수밖에 없다면 그것이 과연 그에게 바람직한 일일까. 그 정도의 업적과 존경을 받기 위해서 과연 그토록 많은 출혈을 감당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헤겔이 말하듯이 이른바 ‘세계정신’의 자기 실현을 위해서 내가 그토록 초라하고 작은 도구로 소모되어야 하는가.

끝으로 생각해 볼 것은 최선을 다하기 위해서 우리는 완벽주의자가 되어 있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점이다. 완벽주의자는 모든 일을 신중하게 하고 완성도를 높이고자 노력하는 자세를 보이는 대신 항상 긴장감을 늦추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그는 일상사에서 여유를 잃고 주위의 분위기를 삭막하게 만드는 결함을 지니게 된다. 자기는 항상 최선을 다한다고 믿기 때문에 흔히 독선적인 성격을 형성하게 되어서 다른 사람들을 쉽게 비판하거나 비난하는 경향이 있음은 물론 타협을 거부하여 공동생활을 하는데 지장을 주기도 한다. 이러한 사람이 어쩌다가 지위가 높아지거나 권력이라도 생기면 독재적 성향을 드러내는 것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천신만고로 자수성가한 사람을 경계하는 눈으로 바라보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물론 이 밖에도 우리가 최선을 다했을 때, 혹은 최선을 다하고자 했을 때, 혹은 그렇게 하고 있다고 믿고 있을 때 생기는 문제점도 많이 있다. 그것은 자칭 최선을 다하면서 살아간다고 믿는 사람들, 자신이 더 잘 알 것이기 때문에 일일이 다 열거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여하튼 ‘최선의 삶’에도 문제는 있다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인가. 물론 원칙이나 신조도 없이 덤벙대며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대안이 될 수는 없다. 그렇다. 역시 대안은 ‘차선을 다하라!’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최선은 전지하고 전능하며 최고의 선인 존재, 즉 완전한 존재인 신만이 관여할 문제이고 결국 차선만이 인간에게 허용된 최선의 전략인지도 모른다.

나는 지난 가을 대학 동창들의 회식 모임에 간 적이 있었다. 그 모임은 마침 뉴질랜드로 이민을 갔던 K군이 오래간만에 다니러 왔다고 해서 마련된 환영 자리였다. 그러나 정작 K군이 귀국하게 된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8년 전 그는 동창인 Y군과 함께 사업을 정리하고 갑자기 뉴질랜드로 이민을 갔었다. 이유는 간단하고 명료했다. 편하게 여생을 즐기기 위해서라는 것이었다. 그들은 거의 무위도식하며 매일 골프와 낚시로 소일하면서 지냈다고 한다. 될 수 있는 한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도록 노력하며상당히 많은 시간을 둘이서만 보낸 셈이었다. 그러다가 지난해 갑자기 Y군이 몸져눕더니 결국 위암으로 판명이 났다는 것이다. 이번에 일시 귀국한 것은 Y군의 소원대로 고국에서 임종을 맞이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서 였다는 것이다.

마침내 지난 주에 그가 숨을 거두었다는 보고를 듣고 이 소식에 처음 접한 우리들은 모두 침통해 하며 숨을 죽이고 있었다. 이윽고 회장직을 맡고 있던 S군이 침묵을 깨고 나더러 한 마디 해 달라는 것이었다. 내가 철학 교수이니까 삶과 죽음에 대해서 자기들보다 더 많이 알고 있으리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나는 부글부글 끓고 있는 전골 냄비를 바라보며 서서히 얘기를 시작하였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우리는 모두 지금 살아 있다는 사실이네. 그러나 이에 못지않게 확실한 것이 있다면 언젠가 우리는 모두 죽게 된다는 사실이네. 죽을 준비를 해야 될 걸세. 사실 우리는 지금 조금씩 계속 죽고 있는 셈이지…….”

나는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 이야기를 계속했다.

“우리가 대학다닐 때 간절한 소망이 있었다면 그것은 곧 천재로서 요절하는 것이었지. 적어도 내 경우에는 그랬었네. 그러나 결국 이제 우리는 천재도 아니고 요절도 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입증한 셈이지……. 천재가 아니라는 건 각자가 스스로 잘 알고 있을 테고, 요절하기에 우리는 너무 늙지 않았나 말일세. 그렇다면 대안은 하나밖에 없지. 만수무강 하는 도리밖에 없네.”

모두들 웅성대며 수긍하는 표정들을 지어 보였다. 나는 이야기를 마무리지었다.

“그런데 만수무강하는 비결이 무엇이겠나. 그것은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지 않는 데 있다고 생각하네. 우리는 대학 시절에 항상 최선을 다하라고 교육받았고, 또 최선만이 삶을 영원하게 한다고 믿으면서 살아왔지. 그러나 결과는 이게 뭔가. 특별히 얻은 것도 이룬 것도 없으면서 사람들과의 관계만 이상해지고 또 건강도 잃고… 그렇다고 해서 지금부터는 빈둥빈둥 놀면서 지내자는 얘기는 아닐세. 그저 한 템포 낮추면서 ‘차선(次善)’을 다하기로 하자, 이걸세. 그렇게 하면 여유가 생겨서 인생을 관조도 할 수 있고 즐기기도 하며 소크라테스가 말한 대로 ‘반성된 삶’을 살 수도 있는 것 아닌가. 그러다 보면 저절로 만수무강이 되는 거지……. 자! 이제부터는 차선을 다하며 살기로 하세!”

나는 건배를 제의했다. 모두들 결코 죽지 않고 사라져갈 뿐인 노병들처럼 “차선을 위하여!” 하고 우렁차게 구호를 외친 다음 철부지들처럼 즐거워하는 것이었다.

그 후로도 나는 이 ‘차선’이라는 것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해왔다. 무엇보다 차선이 과연 최선의 대안이 될 수 있는지의 문제가 그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중용(中庸)의 덕에 대하여 새롭게 관심을 쏟게 된다. 그것은 거의 모든 시대에 있어서 어디에서나 강조된 가장 바람직한 삶의 지혜였으며, 매우 격조 높은 휴머니즘의 표현이기도 하였다. 여기에는 인간이 짐승이 아닌 것처럼 신도 될 수 없다는 너무도 명백한 사실이 잘 담겨져 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으로서 해야 할 당위가 무엇인지를 극명하게 밝혀주고 있다.

그러나 중용도 역시 최선의 길일 뿐이다. 공자는 “중용을 가려서 단 한 달도 지키지 못한다”고 고백함으로써 그 어려움을 표현하고 있으며, 심지어 이것으로 군자와 소인을 구분하고, “군자의 중용은 군자로서 때에 따라 맞게 하는 것이요, 소인의 중용은 소인으로서의 거리낌이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아리스토텔레스도 중용의 덕을 터득하는 것이 최선을 이루는 것이나 그것은 매우 고귀하고 어려운 일이어서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경고한다. 그러므로 차선의 방법으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최악 혹은 극단을 피하고자 노력하는 것인데, 그것은 비교적 쉬운 일이고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그러므로 그는 최선을 다하기 전에 먼저 차선을 다하라고 가르치는 셈이다. 그렇게 하면 우선 여유를 되찾고 독선에서 헤어날 수 있으며, 사물의 본질과 현상의 구조를 제대로 바라보게 될 뿐 아니라 마침내 돌아온 탕아처럼 참다운 자신의 모습으로 복귀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요즈음 내가 ‘차선’이야말로 진정한 의미로 우리에게 ‘최선’의 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이유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