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族譜)

                                                                                              윤삼만

 세월이 흐르면 과거의 일들은 망각의 저쪽으로 희미해져 가게 마련이지만, 6·25는 날이 가고 해가 갈수록 나의 상흔(傷痕)을 후비며 새롭게 되살아난다.

50년이란 긴 시공이 지난 지금, 올해의 6·25를 맞는 심경은 미묘하고 착잡하다.

앞만 보고 뛰다가 정년에 등 떠밀려 직장의 책임을 부려 놓으면서 나는 옆과 뒤를 보게 되었다. 문중의 족보를 정비하는 일도 그 중의 하나다. 가계를 정리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핏줄 하나 하나를 더듬었다.

먼 친척 중에 후사가 비어 있는 사람이 있었다. 6·25 때 전사했다고 한다. 그땐 꽃답던 아낙도 있었다는데, 오래 전에 오간 데가 없어졌다. 그대로라면 가정은 파산되었고 대가 끊긴 셈이다.

난감했다. 6·25 때 전사 통지서라는 것이 도시 믿기지 않는 것이어서 살았는지 아니면 죽었는지… 만에 하나 살아 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렇다고 비워 놓을 수도 없고, 양자를 세울 수도 없어 고민하다가 웃어른과 상의해 봤으나 뾰족한 수가 없었다.

6·25 전쟁이 한창일 때였다. 두 형은 이미 입대한 뒤였다.

“아들 셋 중에 내 아들될 놈은 하나도 없구나.”

내가 대문을 나설 때 아버지께서 하신 말씀은 아직도 내 가슴을 뭉클거리게 한다.

‘잘못되면 대가 끊어진다.’

아버지의 심정은 얼마나 절박하셨겠는가. 그러나 그때 나는 그런 생각을 못했고, L.S.T.에 몸을 맡겨 제주도에서 훈련을 마쳤다. 제1경비대대에 배속되어 제주시 외각에서 중공군 포로를 감시하고 있을 때 ‘완전 무장 출동’ 명령을 받고 L.S.T.를 탔다.

휴전(1953.7.27. 22:00)된 다음 날, 임진강 건너편 장단에 도착했다. 산과 들이 초토화되어 있었다. 포연 냄새가 진동했다. 어젯밤에는 마치 번개가 치고 뇌성과 함께 퍼붓는 소나기같이 포탄이 쏟아졌다고 한다.

한 주일 내내 임시 막사를 지었다. 북송 포로들의 대기소였다.

8월 5일부터 한 달 동안 포로가 교환되었다. 기차에 실려온 북송 포로들은 이곳에서 하루를 묵고 다음 날 수십 대의 트럭에 실려 판문점으로 갔다.

그들은 모포에 치약과 밥으로 글씨를 쓴 플래카드를 트럭 적재함에 붙였다. 트럭 앞쪽에다 가운데 것은 높게, 양 옆은 낮게, 짧은 막대기를 이어 만든 깃대에 적기를 달고, 힘차게 손을 흔들며 노래를 부르면서 갔다.

북으로 십 리쯤 떨어진 판문점은 허허벌판에 천막 몇 개만 쳐져 있었다.

국군 포로는 군용 앰뷸런스 한 대에 6~7명씩 타고 판문점을 거쳐 장단으로 왔다. 얼굴은 창백했다. 한결같이 핏기라고는 볼 수 없었다. 러닝 셔츠에 피로 그린 태극기를 흔들며, 목이 터지게 노래를 부르며 왔다.

어느 누가 눈물 없이 그 광경을 볼 수 있었으랴. 돌아온 사람도 맞이하는 사람도 다 함께 울었다.

’97년 가을 양승용 씨가 북한을 탈출하여 조국의 품에 안겼다. MBC는 특별 기획(1998.6.25~26)으로 국군 포로 생활을 하나하나 증언했다.

포로 교환 당시 모두가 돌아온 줄로만 알았는데, 아직도 북한에 많이 남아 있다고 한다. 같은 탄광에서 일하고 있었던 30여 명의 이름과 고향, 체격이나 얼굴 특징 등이 전파를 타고 그들의 고향 마을로 파고들었다.이들은 총각으로 또는 아내와 아들 딸, 유복자를 가슴에 안겨 놓고 군에 간 사람들이다. 중공군의 인해전술, 휴전 직전의 피비린내나는 전투에서 포로가 되어, 해방 전사라는 이름 아래 탄광촌에서 일을 한다고 했다.

그의 말은 이승과 저승, 남과 북을 넘나들었다. 꿈인가 생시인가. 죽은 줄로만 알고 제사까지 지내던 가족들은 이 소식에 놀랐다.

아들, 남편, 아버지를 군에 보낸 가족들은 살아오기만을 기다렸다. 난데없이 행방불명 또는 전사 통지서가 날아들었을 때, 가족들의 하늘은 무너지고 땅은 꺼졌을 것이다.

아버지, 남편, 아들, 당당하고 뿌리 깊은 그 나무가 통채로 뽑혀 버린, 울혈하는 가슴을 부둥켜안고 그들은 휴전이 되었을 때도 기다렸다. 이제나저제나 돌아오지 않을까. 어쩌면 행여나 살아 있지 않을까. 앵혈진 간절한 소망을 어찌 하룬들 버렸겠는가.

사람은 제한된 시간을 살고 있다. 북에서 한많은 생을 마감한다면 이것도 저것도 아니다. 휴전 당시의 나이가 스물세 살이라면 지금은 일흔 살의 노인이 되어 있다. 고희를 넘기고 살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죽기 전에 가족을 만났으면 하는 마음 오죽하겠는가. 자기의 정체를 아는 이도, 가문의 계승도 희망도 없이 삶을 빼앗기고 푸대접받으며 노동만 제공했으니, 무엇으로 자신의 한을 달래랴.

북한 땅 어느 구석 어느 탄광에서 일하고 있는지… 먼 친척인 그도 살아 있을 것만 같다. 어려운 형편이라도 건강하게 살아 있었으면 좋겠다. 나라가 주선하든지 통일이 되든지 아니면 전 가족이 탈출이라도 하여 고향으로 돌아온다면, 눈을 못 감고 돌아가신 부모님도 구천에서나마 기뻐할 것이다.

우리는 아름다운 씨족제도가 있어 조상을 존경하며 가풍을 이어간다. 이것이 문중의 일이요, 그 기록이 족보이다. 그런데 지금 정리하는 족보가 나를 서글프게 한다. 6·25 전쟁만 없었더라면 온 가족이 오손도손 행복하게 살고 있을 터인데, 누가 이 지경으로 만들었는가. 원망해 본들 소용 없는 일이다.

어쩌면 좋을까. 여러 날을 머뭇거리다가 나는 그의 이름 석 자를 정성 들여 적었다. 그 아래 한 발쯤 빈칸을 남겼다. 빽빽한 숲속을 헤매다가 만난 공터처럼 책장 사이의 커다란 여백이 나를 쳐다보며 미소짓는다. 그의 아내와 아들 딸, 며느리 손자, 다 적을 만한지 다시 어름해 본다.

언젠가 이 빈칸에 그의 식솔들의 이름을 적어 넣는 사람은 정말 신날 것이다.

언제 그 날이 올련지…….

 

 

 

윤삼만

전 사천초등학교 교장. 경남 서예대전 초대작가.

계간 수필로 등단(2000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