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탁새가 동지를 튼 까닭은

                                                                                                  이경은

 목탁 속에 16년째 둥지를 틀고 사는 새가 있다고 해서 찾아 나섰다. 은평구 끝자락에 자리한 수국사란 절에 살고 있는데, 이곳은 세조가 일찍 죽은 큰아들 덕종의 왕생을 위해 지은 원찰이다. 절의 대웅전이 황금으로 개금되어 마치 일본의 금각사를 연상시킨다.

목탁새는 절 한 켠의 추녀 끝에 달아 놓은 대형 목탁 속에 살고 있었다. ’84년 이후 새 한 쌍이 날아들더니, 매년 초여름이면 어김없이 찾아와 대여섯 마리의 새끼를 낳는다는 것이다.

사실 호기심이 동해 찾아오긴 했지만, 목탁 속에서 지저귀는 새를 보며 내심 궁금했다. 하필이면 자연 속의 많은 둥지를 다 놔두고, 겨우 제 몸이나 들고 날 수 있는 목탁 속이라니……. 절에서는 행운을 가져다주는 길조라 해서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다고 한다. 그러나 사방이 꽉 막히고 오로지 작은 구멍 하나만이 하늘을 향해 있는 둥지란 것이 과연 겉에서 보는 것만큼 행복할까 하는 생각이 든다.

새가 우리에게 주는 이미지는 자유다. 날개를 달고서 아무 거리낌없이 천지 자연을 자유롭게 날아다니기에, 인간에겐 영원히 자유에 대한 갈망의 대상으로 여겨진다. 요즘에야 자연 환경이 많이 파괴되어 아파트 근처고 어디고 가리지 않는 일이 허다하다지만, 그래도 역시 새의 보금자리는 저 자연 속의 나뭇가지 끝이나 숲속의 한 구석이 제격일 것이다.

그러나 어찌 보면 이것 역시 인간의 잣대인지 모른다. 우리가 새가 되어 보지 않은 다음에야 새의 마음을 어찌 알 수 있으랴. 사람들이 남의 이야기나 삶에 대해 너무 쉽게 평가내리고 비난을 할 때마다 느끼는 생각이다. 내가 그가 아니고 그가 내가 아닌 다음에야, 아무리 설명해도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러기에 날이 갈수록 남이 살아온 삶에 대해 조금씩 더 겸손하게 되고, 남이 이루어 놓은 작은 일이라도 그 과정의 노고와 수고를 높이 평가하게 된다. 세상살이 어느 것 하나 도무지 쉬운 게 없다는 걸 요즘 들어 자꾸 느끼게 돼서다.

혹시 새들은 목탁 속의 좁은 세상을 자연의 하나로 여겨 아늑함을 느꼈을 수도 있다. 그러기에 16년간을 계속해서 거기에다 자기들의 보금자리를 틀었을 것이다. 그들에겐 자연의 거친 바람보다는 목탁 속의 평온함이 더 좋았던 모양이다.

학교 시절 『갈매기의 꿈(Jonathan Livingston Seagull`:`조나단 리빙스톤이라는 이름의 갈매기)』을 읽었을 때, 나는 저자의 의도와 창작의지를 충분히 인정하면서도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점이 있었다. 조나단이 하늘 저 멀리까지 비상하는 모습`─`지상 위에서가 아니라 무한한 창공 속을 자유롭게 나는 갈매기의 꿈이 위대해 보이기는 했지만, 한편으로는 뭐 굳이 그렇게까지 힘들게 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서 비상하면서 얻는 자유도 좋지만, 지상에서 여러 마리의 친구나 가족들과 함께 사는 모습이 나에겐 더 행복하게 보였다. 조나단의 비상이 내겐 ‘너보다는 나의 삶이 확실히 높아…’라고 부르짖으며, 너무 당당하게 군림하는 우월자의 모습처럼 여겨졌다.

만약 지금 나보고 두 가지의 삶 중에서 굳이 한 가지를 택하라고 한다면, 난 분명히 지상 위의 행복을 택할 것 같다. 좀 덜 위대하고 덜 알면 어떠랴 싶다. 어쨌든 참으로 행복할 수만 있다면 그만이지 않겠냐는 생각이다. 점점 더 높아지고 더 나은 삶을 살아야만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는 것이 피곤하게 여겨진다. 요즘 들어선 작고 소박한 즐거움들을 느끼며 살고 싶어진다. 아마 난 원래부터 위대한 무리에는 들지 못하는 종족으로 태어난 모양이다.

새들을 보고 있자니, 저렇게 목탁 속에 둥지를 튼 데는 분명 무슨 의미가 있을 것만 같다. 자기들 삶의 모습을 통해 인간들에게 무엇을 알리고 싶었을까… 하고 생각을 거듭하면서 궁금증을 풀어보려고 애를 썼다. 그러다 나란 인간이 참 못말리는 족속이구나 하는 생각에 웃음이 비어져 나온다.

원래 목탁이란 절에서 쓰는 불구(佛具)의 하나로, 입에는 여의주를 물고 용머리에 물고기의 몸을 취한 ‘목어’가 시대가 흐르면서 차츰 모양이 변하여 지금의 모습으로 되었다고 한다. 이것에는 물고기가 잠을 잘 때도 눈을 뜨고 자듯이, 수행에 임하는 수도자들도 잠을 줄이고 부지런히 수행하라는 것과 물 밑 세계에 사는 모든 중생들을 제도하기 위한 상징적 의미가 들어 있다.

그러고 보면 굳이 새가 와서 목탁 속에 사는 의미도 헤아려질 것 같다. 세상이 점점 혼란해지고 사방 천지에 욕망과 유혹은 가득하며, 삶의 가치관을 쉽게 잃어버리는 시대이기에, 목탁새는 조용히 날아와 둥지를 틀면서 인간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것처럼 생각된다. 언제나 마음의 경계를 허물지 말고 눈을 바로 뜨고 치열하게 살아가라는…, 눈을 한 번 질끈 감으면 모든 것이 편해질 수 있는 세상살이에도 눈을 크게 뜨고 정신을 가다듬으라는 암시 같다.

목탁새가 작은 구멍으로 고개를 내밀고 지저귄다. 구경온 사람들은 신기하다며 쳐다본다. 비바람에 색이 바랜 나무 목탁 속에서 새는 여전히 그 조금만 입으로 지절댄다. 그래, 오늘 여기에 온 사람들은 모두들 자기 나름대로의 해석으로 그 목탁색의 존재를 가슴에 품고 돌아갈 것이다. 자연은 그대로이지만 사람들이 사계절의 의미를 붙여 묘사하듯이 말이다.

오늘 밤 이것을 화두로 삼아 긴긴 밤을 지새워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목탁새가 둥지를 튼 까닭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