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기(李秉岐)의  

 

'낙화암(落花岩) 찾는 길에'

 

일시: 2000년 12월 16일

장소: 수필문우회 회의실

참석 인원: 문우회 회원 27명, 계수회 회원 13명

사회: 허세욱

정리: 권일주

 

사회 : 안녕하십니까. 지금부터 2001년도 계간 수필 봄호를 위한 합평회를 시작하겠습니다.

오늘 합평할 작품은 가람 이병기 선생의 ‘낙화암 찾는 길’입니다. 이 작품은 1929년 6월, 당시 <신생> 잡지에 게재되었던 작품입니다. 먼저 이분의 생애와 문학적 업적, 인생 편력 등을 소개한 뒤에 이 작품을 낭독하고, 그 다음 미리 약정한 세 분의 합평자, 김수봉, 정목일, 최병호 선생님과 함께 본격적인 합평에 들어가겠습니다.

1892년 전라북도 익산군 여산면에서 출생한 가람 이병기 선생의 생애를 살펴보면, 한평생을 통해서 대체로 세 가지 면모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학자요 교육가인 면과 관리로서의 면, 또 문인으로서의 면모입니다.

학자로는 주로 시조 연구, 시조 혁신운동, 한글 연구에 한평생을 바치셨으며, 교육가로서는 1913년에서 1921년까지 여산소학교를 시작으로, 동광중학, 휘문중학을 비롯해서 20년 동안 중학교 교사를 역임했습니다. 그리고 1946년에서 1950년까지 서울 문리대 국문과 교수, 전북대 교수, 학술원 회원으로 종신을 했습니다. 또 그 사이에 1945~1947년까지 문교부 편수관을 지내기도 했습니다.

문인으로서는 1924년에 시조 ‘제주 길’을 동아일보에 처음 발표한 뒤 시조 77편을 남기셨고, 1926년 ‘그리운 가을밤’이라는 수필을 발표한 이래 39편의 수필을 발표했습니다. 그리고 이 ‘낙화암 찾는 길에’는 1929년에 발표한 글인데, 이 작품을 초기의 대표 작품, 혹은 대표 기행문이라고 일컫고 있습니다. 이 외에 평론 59편이 있습니다.

이분은 1898년부터 10년간 서당에서 한문 수학을 하고, 여산보통학교를 거쳐 한성사범학교를 졸업했습니다. 1942년에서 1943년까지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검거 수감되는 불행을 겪었고, 그 뒤 해방 직전에는 상해나 미국으로 탈출을 기도했다가 연행된 적도 있었습니다. 이상입니다.

 

그러면 이분의 39편의 수필 가운데 하나인 ‘낙화암 찾는 길에’를 가지고 합평에 들어가겠습니다. 세 분의 선생님께 미리 과제를 드리겠습니다. 첫째, 주제를 찾아주십시오. 둘째, 가람 선생의 기행수필을 평가해 주시고, 기행수필이라는 것에 대한 견해와 이론을 피력해 주십시오. 그리고 세 번째, 이 기행수필의 장단점과 이 글의 문장, 구성에 대한 평가를 해 주십시오.

유혜자 선생님께서 작품을 읽어 주시겠습니다.

 

 

 

(본문)

 

落花岩 찾는 길에

 

  

백제 왕릉을 보고 얼마쯤 가면 신작로가 나선다. 이 길로 들어가노라면 조그마한 산 하나가 가로놓여 있고, 그 산 밑으로는 초가 혹은 기와집들이 연해 있고, 집과 집 사이 부근에는 나무들이 수두룩히 서 있어 바야흐로 우거진 녹음이 새롭게 보인다. 여기를 처음 오는 사람으로도 ‘저기가 부여 읍내다’ 하는 생각을 얼른 나게 한다.

사람을 볼 때에는 첫눈에 드는 얼굴이 있다. 첫눈에 드는 얼굴은 눈이나 코나 입이나 귀를 똑똑히 다 본 것이 아니고 눈도 코도 귀도 입도 아닌 그러한 얼굴이다. 이와같이 글의 첫눈에 드는 부여는 저 산도 아니고, 집도 아니고, 나무도 아니고, 다만 그러한 부여만이다. 그리하여 나는 부여를 처음 볼 때부터 사랑한다.

부여에 드는 길로 평제탑(平濟塔)도 보고, 고적 진열관도 보고는 그 뒤 부소산(扶蘇山)으로 오른다. 부소산은 멀리서 바라보기엔 조그마한 단조한 산인 듯하더니, 이제 올라와 보니 적으나 복잡하고 아득한 산이다. 더구나 소나무와 잡목들이 빽빽하게 길어 있어, 보면 보일 만한 곳이라도 어디가 어떻게 된지를 사뭇 모르겠다. 산새들은 예서 제서 운다. 산채(山菜)를 캐는 아낙네의 소곤대는 소리도 난다. 나는 이 숲속으로 어슬렁어슬렁 걸어가며 부소산의 한적하고 유아(幽雅)한 맛을 아니 느낄 수 없다.

반월성지(半月城址)를 지나고 보면 길이 두 갈래로 났으니, 하나는 영월대(迎月臺)로 가는 길이다. 나는 먼저 영월대로 하여 유인원비(劉仁願碑)며 창고적(倉庫跡)을 보고 다시 가던 길로 도로 와 송월대(送月臺)에 이르러 사자루에 올랐다.

송월대는 부소산에서 제일 높은 곳이다. 제일 좋은 전망대다. 이곳에 서서 사면의 원근경을 다 바라볼 수 있다. 파란 비단폭을 굽이굽이 펼쳐 두른 듯한 백마장강(白馬長江)이며, 천 송이 만 송이 꽃밭 속 같은 주위에 있는 여러 산과 산들은 오로지 부소산 하나만을 위하여 생긴 듯하다. 그러니까 경주와 같이 주위에 있는 장산(壯山)들에게 조금도 위압을 받는 일도 없고, 한양과 같이 에워싼 산협(山狹)도 아니고, 평양과 같이 헤벌어진 데도 없이 아주 구격(具格)이 맞게 되었다. 그리고 구석구석이 묘하게 아름답게시리 되었다.

부여를 찾아오는 이는 부여의 고적만 보아서는 안 된다. 그저 고적은 그만두고라도 부여의 유다른 천연(天然)한 승상(勝狀)을 보아야 한다. 산도 좋고 물도 좋고, 산과 들이 아울러 좋게 된 이 부여야말로 다른 곳에서는 쉽사리 얻어 볼 수 없는 곳이다. 옛날 전하는 ‘江山如此好 無罪義慈王’이라는 시구도 그럴 듯하지 않은가? 북으로 천정대(天政臺), 서로 대재각(大哉閣), 자온대(自溫臺), 수북정(水北亭), 구룡포(九龍浦), 남으로 금성산(錦城山), 대왕포(大王浦), 동으로 청도성(靑島城)을 바라보며, 훌륭하던 백제의 영화도 저러하거니 하고 한번 웃을 뿐이다. 송월대를 버리고 다시 서로 이산 일맥을 타고 내려다보니, 길은 뚝 끊어지고 수십 길 되는 절벽이 있고, 절벽 밑에는 시퍼런 강이 흐른다. 이 절벽이 낙화암이다.

낙화암은 옛날 나(羅)·당(唐)의 연합군이 백제의 궁성을 함락할 때 비빈(妃嬪), 궁녀들이 버선발로 뛰어나와 여기서 몸을 던져 죽었다는 곳이다. 이 바위에 나는 홀로 서 있다. 눈을 감고 그때의 광경이나 다시 그려보자 ─ 꽃 같은 미인들은 수없이 떨어진다. 자개잠 금비녀는 내려지고, 머리채는 흐트러지고, 치맛자락은 소스라치며 펄렁거린다. 그리고 옥패(玉佩)는 마주쳐 땡그랑거리고, 풍덩실풍덩실 물 소리는 난

다. 만일 그때 의자왕도 이리 몰려와 이 광경을 보았더라면 어찌나 되었을까? 그 어느 치맛자락을 잡고 같이 몸을 던져 죽어버렸을지도 모를 것이다. 과연 그랬더라면 김유신, 소정방 앞에서 행주(行酒)의 치욕도 아니 받았을 것이다. 더욱이 의자왕의 일이 가엾게 생각된다. 차라리 백마강에 던져 어복리(魚腹裏)에 장(葬)할 망정 저 국수(國讐)에게는 더럽히지 않겠다는 백제의 혼, 백제의 꽃은 영원히 인간에 살아 있을 것이다. 나는 이 백제의 꽃을 보고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한다. 그리하여 나의 사랑하는 부여에서도 가장 이 낙화암을 사랑한다.

지금 백마강은 고요히 흐른다. 이따금 고기들이 뛰노는 소리만 털부덩 난다. 한편 언덕에는 빈 배가 매여 있고, 그 옆에는 한 늙은이가 낚싯대를 들고 앉아 있다. 그리고 두어 채 범선(帆船)은 느릿느릿 부산(浮山) 모롱이를 지나간다. 나는 이윽고 서 있다가 갑자기 생각나는 홍춘경(洪春卿)의 ‘國破山河異昔時 獨留江月幾盈虧 洛花巖畔花猶在 風雨當年不盡吹’라는 시구(詩句)를 읊으며 벼랑길로 들어 요리조리 내려가 고란사(皐蘭寺)를 찾았다.

고란사는 한쪽을 일부러 헐어내고 집을 지어 놓은 것같이 보인다. 뒤는 절벽, 앞에는 청류(淸流)다. 수백년 묵은 담쟁이덩굴은 용트림을 하여 절벽으로 오르고, 절벽에는 틈틈이 고란(皐蘭)이 파랗게 나고 그 밑에서 맑은 샘이 흐른다. 나는 이 샘물을 마시고 이 절에 있어 한여름을 났으면 좋겠다. 좌우의 녹음 속에서 굴러오는 새 소리, 벌레 소리도 듣고, 앞 강을 스쳐오는 바람도 맞고, 심심하면 조룡대(釣龍臺), 낙화암도 올라보고 신팔경(新八景), 구팔경(舊八景)도 낱낱이 찾아보고, 달밤에는 배를 잡아타고 백마강으로 오르락내리락 하기도 하였으면 좋겠다. 아아, 좋은 곳이다.

 

 

 

 

사회 : 잠시 우리는 낙화암 바위 위에 서 있는 기분입니다. 이것은 71년 전 작품으로 풍류가 가득한 작품입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우리 회원 가운데 멀리 계시면서도 남도의 풍류를 한껏 지니신 세 분을 오늘의 합평자로 모셨습니다. 이 글이 기행수필이지만 숨겨진 주제가 있을 듯합니다. 먼저 이 글에 숨겨진 주제를 찾아 주십시오.

최병호 : 낙화암 이야기로 상징되는 백제의 혼을 ‘부여의 유다른 천연한 승상’에서 읽는 글입니다. 패망과 함께 영욕은 한낱 과거로 사라졌지만 왕도의 남겨진 자취들은 승상과 더불어 하나의 예술로 변모해서 우리를 부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이 글은 예술적으로 새롭게 태어난 왕도의 아름다움이 주제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김수봉 : 이 글의 주제를 여러 시각으로 볼 수 있지만, 제가 보기에는 ‘조화의 미’를 찾고 있는 것이 주제라고 생각합니다. 표면적으로는 부여를 사랑한다, 낙화암을 사랑한다는 것이지만, 왜 내가 사랑하는가를 이야기하는 과정에서 조화의 미를 이야기했습니다. 조화를 이루는 종합적인 이미지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즉 여러 가지 풍물이 조화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바로 그것을 지은이는 이 글의 둘째 단락에서 사람의 인물에 비유해서 이야기해 주고 있습니다. 즉 코도 예쁘고 눈도 예쁘고 귀도 예쁘고 모든 것이 예뻐서가 아니라 그런 것들이 조화를 이루는 아름다움 때문에 미인으로 느끼는 것처럼 부여가 하나 하나의 아름다움 때문이 아니라, 그것들이 적절히 조화를 이루어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이라는 작자의 생각을 말한 것입니다. 특히 ‘산도 좋고 물도 좋고 산과 들이 어울러 좋게 된 이 부여야말로’라는 식으로 강조를 했습니다. 그리고 이 글 속에서 자연과 인간을 서로 교차시키거나 대비시키면서 쓴 점과 과거 역사적인 것과 글쓴이가 현재 살고 있는 현대와의 조화를 보여 주는 것도 이 글의 주제와 맥을 잇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정목일 : 부여가 갖고 있는 유다른 승상(勝狀)에 첫번째 주제를 두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부여가 갖는 산수의 조화, 구석구석 아름다운 경치와 맛, 다시 말하면 자연미의 재발견, 재음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낙화암의 상징성과 의미성입니다. 낙화암을 생각하면 백제가 최후를 맞은 비극성과 부여의 자연미를 대표하는 것이라는 자연성이 생각납니다.

저는 여기서 백마강과 낙화암, 경상도 진주로 말하자면 진주성과 의암이 있습니다만, 두 곳 다 절경이고 비극적인 역사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연이 아름답기 때문에 죽음조차도 포용하는 조화의 힘이 있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그래서 이 작품의 큰 주제는 자연미의 영원함과 유연성, 생명성이 인간의 일시성, 즉 전쟁이나 왕도의 흥망, 개인의 부귀 영화 같은 것을 포용한다는 메시지라고 보았습니다.

 

사회 : 고맙습니다. 세 분 모두 준비를 많이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이 작품의 주제는 부여와 낙화암이라는 자연미와 함께 역사의 비극성을 상징, 표현했다는 것으로 좁혀지는 것 같습니다. 아까 제가 가람이 쓴 수필이 39편이라고 했는데, 그 가운데 30편이 기행문입니다. 그리고 이분의 수필 가운데 『가람의 출전과 그 유래』라는 자기 자평 수필이 있는데 거기서 가람은 이렇게 밝혔습니다. ‘나는 강호를 좋아한다. 나도 강호와 같은 몸이 되었으면 한다. 강호처럼 넉넉한 사람이면 좋겠다.’ 그러니까 자기 수필의 경향과 취향을 밝힌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세 분이 말씀하신 대로 이 글의 주제는 자연미의 찬미와 거기에 역사성을 가미해서 상징화했다고 봅니다. 이 밖에 토론을 활발히 해 주실 다른 의견을 가지신 분 계시면 말씀해 주십시오.

고봉진 : 숨은 주제를 찾자고 사회자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수필이 된 연도와 그 당시 상황 그리고 이병기 선생의 평생을 볼 때 이때는 국파된 상태, 즉 나라를 잃은 상태였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작자가 느끼는 우리 나라 자연에 대한 사랑, 나라를 잃은 설움, 그런 것들이 함께 담겨 있는 글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것이 주제라고 봅니다.

유경환 : 이 글의 숨은 메시지는 ‘유다른 천연한 승상을 보아야 한다’라고 강조한 곳에 있다고 봅니다. 백제의 멸망을 빌미로 해서 다른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이응백 : 여기에 홍춘경(洪春卿)의 시가 인용되었는데, 홍춘경은 연산군 때의 사람입니다. 그 시를 인용해서 자기의 느낌, 감회를 대신했습니다.

김진식 : 이선생님께서 그 한시를 해석까지 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이응백 : 국파산하이석시國破山河異昔時(나라는 망하고 산하는 예전과 달라졌네)독류강월기영휴獨留江月幾盈虧(한갓 머물러 있는 강의 달빛은 몇 번이나 차고 기울었던가)낙화암반화유재洛花巖畔花猶在(낙화암 바위 가에 꽃은 아직도 피었건만)풍우당년불진취風雨當年不盡吹(바람 불고 비 내리는 그 해는 여전히 그침이 없네) 

 

사회 : 자, 그러면 다음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이 기행수필의 숨은 주제를 살펴보았습니다. 기행수필이 요즈음 우리 문단에서 상당히 붐을 이루고 있습니다. 한번쯤 기행수필에 대한 검토가 필요한 시기가 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 기회에 검토를 해보기 위해 이 작품을 합평에 올렸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만, 먼저 가람의 기행수필을 전체적으로 평을 해 주시고, 이런 기행문이 어떤 시사점이 있는가, 어떤 방법이 효과적인가 하는 것을 토론해 주십시오. 또 세 분께서는 기행수필에 대해 어떤 견해를 가지고 계시며, 어떤 기행수필을 쓰고 계신지 말씀해 주십시오.

정목일 : 이 작품은 스케치 기법으로 쓴 글입니다. 처음에는 윤곽을 잡아주는 추상적인 방법으로 시작해서 점점 구체적이고 섬세한 방향으로 갔습니다. 대가다운 면모를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기행문이라고 하면 보통 일회성적인 감정을 시간의 경과에 따라 일별하며 쓰는 것이 보통입니다만, 영국의 신문기자 출신 브리트라는 작가는 피라미드를 보고 글을 쓸 때 동이 틀 때, 정오에, 석양 무렵에, 멀리서, 가까이

서, 눈이 올 때, 비가 올 때 등 수백 번을 살펴서 허공을 주시하고 있는 듯한 피라미드의 표정을 자신의 체험과 명상을 통해 쓰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작가들은 단순히 지나가며, 일별하며 쓰기 때문에 그 속에 체험이라든가 명상의 공간이 없습니다. 표피적이고 단순 찰나적인 경우가 많으며, 보고 느끼는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낙화암 찾는 길에’는 지금부터 71년 전에 쓰여진 것이지만, 보이지 않는 이면까지 투시해서 써내려 갔습니다. 보이는 것에 닿아있는 보이지 않는 것, 들리는 것에 닿아 있는 들리지 않는 것을 찾아내는 것이야말로 문학으로서의 기행수필의 표현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김수봉 : 이 글은 기행문 형식입니다. 그러나 이 글을 읽으면 요즈음 많이 쏟아져 나오는 기행수필들과 자연히 대비가 되는 것을 느낍니다. 요즈음 사람들은 기행문을 쓸 때 본인이 흥분하고 들떠서 나만 보고, 나만 느낀 것 같은 글을 흔히 씁니다. 여정이나 행로를 쓰는 것, 즉 여행 안내서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글은 71년 전에 쓴 글이고, 또 이 글을 쓸 때 가람의 나이가 30대 후반이었는데도 감정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여정을 따라 평면적으로 이동해 가는, 기행문이 가질 수 있는 기본적인 골격을 가지면서도 단순히 보고 느끼는 것이 아니라, 보고 나서 의미를 찾아내는 것에 생각을 많이 한 것 같습니다. 부여 읍내에서 부소산, 반월성지, 영월대, 송월대, 사자루, 낙화암, 고란사, 그 여정을 거치면서 하나 하나의 사물에서 역사를 보기도 하고 자연의 아름다움과 의미를 느낍니다. 또 이 글의 말미에, 고란사에서 한 해 여름을 그야말로 신선처럼 살고 싶다고 했습니다. 한국 선비의 풍모를 은은히 담고 있는 부분입니다. 이 글은 기행문이면서도 더 많은 의미와 사상을 생각하게 하는 기행문입니다. 글을 써가는 과정에서 자연과 인간, 역사와 오늘을 연결하고 대비시키면서 쓰는 방법이 대가의 안목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최병호 : 기행수필이면서 기행수필이 아닌 필법에 주목했습니다. 부소산을 돌아보는 코스가 두 가지인데, 여기서는 오른편 코스를 택해 썼습니다. 처음에는 간략하게, 자연이나 유적의 아름다움을 간단히 기술했지만, 요점이 되는 부분에서는 자세하게 패러그래프를 바꿔가며 썼습니다. 그 기법이 무척 산뜻한 구성으로 읽혔습니다. 또 탑의 이름이나 석불좌상의 사연 같은 것도 망국의 한이나 외세 침탈의 한을 되새기도록 그 명칭을 옛날 그대로 썼고, 기행문으로서 날짜, 시차에 충실하기보다는 소묘 같은 성격을 띠면서도 그것이 아닌 것에 훨씬 많은, 내밀한 내용을 느끼게 했습니다. 우리가 배워야 할 패턴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아직 기행문을 한 편도 못썼습니다만 이 글이 저에게 시사하는 것이 많았습니다.

 

사회 : 고맙습니다. 기왕 말이 나왔으니, 기행수필을 어떻게 쓸 것인가에 대해서 간단히 말씀해 주십시오.

정목일 : 보통 아는 것만큼 보이고, 체험한 것만큼 보이고, 생각하는 것만큼 보인다고 합니다. 보는 방법, 보는 눈을 이야기하는 것이지요.

흔히 기행문을 쓰는 시각이 일과성, 일회성, 표면적이기 쉽고, 스케치하듯 쓰는 것도 좋지만 좋은 기행문이 되려면 거기에 오랜 체험과 명

상의 시간이 녹아 있어야 하고 전체적, 총체적으로 내부를 보는 눈과 다양한 각도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러니까 기행문을 쓰는 요건은 사

물을 보는 법의 개안, 안목을 높이는 것이 가장 중요하며, 체험과 명상이 있는 그런 문장이 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김수봉 : 기행문을 쓴다면 저는 이렇게 쓰고 싶습니다. 제가 쓴 기행문을 읽은 독자가 안 가본 곳이면 꼭 가보고 싶은 충동이 생기게, 또

가본 곳도 다시 한 번 가고 싶게 만드는, 그런 기행문을 쓰고 싶습니다. 또 글을 쓴 이의 은은한 인품을 글 사이사이에 끼워 넣는 기술을 좀

더 공부하고 싶습니다.

최병호 : 과거가 변했다는 것은 먼저 인간이 변한 것이라고들 합니다. 과거에 만들어진 자연이나 인물이 분명히 내 변화와 관계는 있는데

사실을 보는 눈, 내 눈의 시점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변화되어 가는 제 자신, 제 모습을 확연히 알 수 없어서 기행문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아직 챙기지 못했습니다. 사실 얼마 전에 괴테가 쓴 『이탈리아 기행』을 보았는데 더욱 자신이 없어졌습니다.

 

사회 : 1978년 <수필문학>에서 ‘가람 이병기의 인격과 그의 수필’이라는 특집을 냈었습니다. 거기서 가람 연구가 몇 분이 인상 깊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즉 이동주 씨는 “군소리 없는 직선적인 전공법을 썼다”고 했고, 평론가 임중빈 씨는 “서경의 묘미와 실경을 사실적으로 표현했다”고 했습니다. 또 백승철 씨는 “자적하는 강호인의 심회다”라고 했습니다. 그런 여러 가지를 볼 때, 가람은 기행문을 통해서 인생론을 폈다 라는 이야기로 전체를 요약할 수 있다고 봅니다. 보충하실 말씀이 있으시면 해 주십시오.

정봉구 : 정목일 선생께 여쭈어 보겠습니다. 조금 전에 선생께서 보는 사람의 눈높이만큼 본다고 하셨는데 그 말씀에 저도 동감합니다. 그러나 좋은 기행문을 쓰자면 오래 반복해서 보아야 한다고 하셨는데, 그렇다면 한 번 보는 것으로는 기행문을 쓰지 못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정목일 : 쓸 수 있습니다. 쓰는데 작가는 한순간적으로 보는 것 같아도 사실 그 작가는 평생을 통해서 체득한 경험과 명상을 통해서 보게되는 것이지요. 중요한 것은 오랜 관찰과 대상과의 체험, 명상을 가질수록 좋은 기행수필을 쓸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정봉구 : 기행문이라는 것이 역사의 탐방이나 심오한 탐구가 아니기 때문에 지나가면서 느끼는 시정이라든가 신비감도 가볍게 쓸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정목일 : 물론 그렇습니다.

 

사회 : 체험과 명상이 필수적인 전제가 될 수는 없겠지요.

유경환 : 이 수필을 읽고 기행문이라는 것에서 현실 묘사와 과장, 비유가 어느 정도 허용되느냐 하는 것을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파란 비단폭을 굽이굽이 펼쳐 두른 듯한 백마장강이며, 천 송이 만 송이 꽃밭 속 같은 주위에 있는 여러 산과 산들은 오로지 부소산 하나만을 위하여 생긴 듯하다’라는 구절을 읽을 때, 제가 본 낙화암, 백마강 하고 가람 선생님의 표현하고 너무 차이가 납니다. 다른 사람이 쓴 것이라면 말을 않겠지만 가람 이병기 선생의 업적이라든가 위상을 생각해 볼 때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제가 현장을 본 것은 40년 전이고, 이 글이 쓰여진 것은 76년 전입니다. 제가 보았을 때는 겨우 나룻배를 저어 건너가는 강이었는데 글 쓰실 때 ‘파란 비단폭을 굽이굽이’할 만한 그런 강이었겠는가 의문입니다만, 가람이 이렇게 썼으니까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하는 생각입니다.

또 하나, 이 글은 기행문입니다. 역사적인 사실을 중시해야 하는 글입니다. 1930년대에 이 글이 쓰여졌습니다만, 그 당시 우리 나라의 역사 텍스트는 일연의 『삼국유사』와 김부식의 『삼국사기』 두 가지였습니다. 그리고 당시 사학계의 논란의 대상이 된 것은 김부식의 『삼국사기』입니다 사대주의 사관이라는 것입니다. 가람 이병기 선생이 국사학자이기도 하기 때문에 이렇게 쓰셨는지, 김부식의 사관을 좇아서 나당 연합군을 언급한 것인지, 어느 정도까지 역사 사실들을 통찰하고 쓰셨는지 하는 점이 후학이 볼 때 의문이 가는 점입니다. 어떻게 이 분까지도 이렇게 썼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최병호 : 백마강도 장강이 아닙니다. 금강의 한 부분이며 정동리 앞 범바위에서 현북리 파진산까지 약 16km를 백마강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금강의 한 부면을 잘라서 부르는 것인데, 여기서는 백마장강이라고 금강 전체를 부르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기행문에서 그래도 되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저도 들었습니다.

 

사회 : 우리는 지금 이 배경을 논하기 앞서서 자연미와 역사의식을 이미 긍정하고 있습니다. 또 자연미의 찬미, 역사의식의 재현 외에도

이분이 가지고 있는 현실적인 풍류의식이 이 작품을 쓰는데 바탕이 되지 않았나 하고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뒷날 가람을 이야기할 때 그 분의 친구나 제자들이 풍류쟁이라고 했고, 또 많은 분들이 이분의 풍류에 대해 이야기를 합니다. 풍담, 풍류적인 시각에서 ‘낙화암 찾는 길에’를 본다면 그런대로 긍정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나 하는 생각입니다만, 세 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김수봉 : 아까 ‘나당 연합군’이라든지, 역사가 실제 그 이후에 밝혀진 것과 차이가 난다는 것을 지적하셨는데, 저는 수필에서 역사적 고증은 그다지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쓸 때, 그 당시 가람이 역사적으로 알고 있던 것, 그 정도로서의 바탕과 배경을 가질 뿐이지 그것이 꼭 맞느냐 틀리느냐 하는 것은 따질 것이 못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글의 끝부분, ‘고란사에서 한여름을 났으면 좋겠다’라는 부분에서 가람 선생은 풍류의 진수를 스스로 담아냈다고 생각합니다.

 

사회 : 신입 회원들께서도 말씀해 주십시오.

엄정식 : 저는 철학 전공이라 그런지 글을 읽으면 개념적인 연결을 먼저 생각하게 됩니다. 아름다운 풍광과 비극성이 만나는 데는 필연적인 이유가 있다고 보았습니다.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보면 비극성이 따라온다고 보는 것이지요. 또 이분의 글은 언제나 허허로움이라고 할까, 풍류라고나 할까, 아니면 지나가는 에피소드 같은 것으로 끝이 나는데 그것이 제게는 상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장난기가 어릴 만큼 여유를 갖고 보는 눈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글은 단순히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식의 애국적인 글이 아니고 역사성, 비극성으로부터 오히려 거리를 유지하고 싶은, 그런 것이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다 아시겠지만 ‘관광’이라는 말은 ‘관국지광’이라는 말에서 나온 것으로, 단순한 관광 ‘sightseeing’이 아니라 문화를 본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때문에 기행문을 쓰려면 그것이 거기에 있는 이유, 그것이 우리에게 함축하는 의미, 그런 것들이 담겨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역사적 사실, 실증주의적 접근 방법에 연연할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김소경 : 제가 쿠바 아바나를 다녀와서 그곳에 살고 있는 헤밍웨이의 백 세된 아들을 보고 나서 기행문 한 편을 쓴 적이 있습니다만, 오늘

여기서 공부를 하고 나서는, 다시는 기행문을 쓰지 못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너무 무게를 두고 쓰는 것이 오히려 부담스럽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김국자 : 교무실에 들어온 여학생 같은 기분이 들어 정신이 없습니다. 김소경 선생처럼 저도 기행문을 못 쓸 것 같습니다. 그리고 기행문 한 편을 가지고 독자들이 이렇게 깊게 생각하는가 해서 놀랐습니다.

김시헌 : 기행수필과 우리가 쓰는 일반 수필이 어떻게 다르냐 하는 것이 문제인데, 저는 기행수필이 일반  수필 속에 들어간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소재가 여행갔을 때 혹은 여행중에 얻은 것일 뿐이고, 일반 수필을 쓰는 방법, 구성, 세계, 철학이 여행가서 얻은 소재 속에 나타나면 그것이 기행수필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역사성이나 지리성은 크게 중요하지 않은 것이지요.

한형주 : 지금 두 분이, 이제 기행수필을 쓰기 힘들겠다고 하셨는데 저도 동감입니다. 요즈음 흔히 기행수필이라고 나오는 것들은 엄밀히 따지면 가이드 북이지 기행수필이 아닙니다. 기행수필이라 하면 최소한도로 기행하면서 느낀 특별한 이야깃거리, 자기의 사상 등 수필적인 무언가가 있어야 합니다.

 

사회 : 우연히 이 자리가 기행수필에 대한 세미나가 되고 말았습니다. 퍽 소중한 이야기들이 오고 간 것 같아 잠깐 정리해 보겠습니다.

기행수필은 원칙적으로 일반 수필과 같아야 한다. 다만 소재가 다를 뿐이고, 예술성의 중시 또한 일반 수필과 마찬가지이다. 자연미와 역사성도 있어야 하며, 작가 본연의 개성의 발로가 있어야 한다 라는 말씀들이었습니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세 분께서 이 ‘낙화암 찾는 길에’의 단점을 지적해 주시고, 기행수필의 경고할 점을 말씀해 주십시오.

정목일 : 문장 표현에서 추상어가 많습니다. 구체어보다 추상어가 많이 들어가서 애매모호한 표현이 있습니다. 예컨대 조그마한, 단조한, 적으나 복잡하고 아득한 등인데 모두 추상적인 것들입니다. 이런 것들은 정확한 언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 다음에는 한자어, 한시를 많이 쓰셨는데, 독자들에 대한 배려가 적다는 것도 지적하고 싶습니다.

이 글의 좋은 점은 작가의 풍류적인 기질이 끝에 적나라하게 드러난 것입니다. 자연 속에서 모든 것을 초연한, 그런 감회를 느끼는 것으로 수필을 장식했는데, 이것으로 자기의 삶의 모습을 꾸밈없이 보여 주며 수필을 장식한 것입니다.

최병호 : 구성이 처음에는 가볍게 소개하고 열거하고, 중요한 것은 나중에 요약 설명했습니다. 산뜻한 장점으로 부각되었습니다. 제게 생경하게 와닿는 말들은 구격이 맞다, 천연한 승상, 어복리에 장하다, 고기들이 뛰노는 소리만 털부덩한다 등이었습니다.

김수봉 : 오래된 글인데, 그 시대의 다른 글들과 비교할 때 구투가 아니고 현대적 문장, 감각이 드러난 선구적인 글입니다. 제가 보기엔 한시와 한문도 적절히 들어갔다고 생각합니다. 단점이라면, 부여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하기 위해 다른 것을 대비시키는데, 너무 주관적으로 맞지 않게 한 부분이 있는 것입니다.

 

사회 : 지금 우리는 아주 어렵게 가람을 야단치는 중입니다. 불만스런 점이 있다면 모두 이야기해 주십시오.

박현정 : 이 자리에서 여러 선생님들의 말씀을 들으니까, 수필은 역시 사유의 글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까 어떤 분이 역사의식이 없다고 하셨는데, 역사에 대한 어느 정도의 과장은 바로 문학이 주는 매력이고  또 허용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박철호 : 이 글을 읽고 솔직히 말해서 좋은 느낌은 못 느꼈습니다. 몇 분이 자연미를 말씀하셨는데, 그 만큼 자연에 대한 묘사가 잘 되었다

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낙화암을 예찬하기 위한 의도로 쓴 글로서 사실적인 묘사가 아니라 주관적인 묘사가 강했습니다. 기행수필을 쓸 때, 어떤 곳을 의도적으로 예찬하려 했을 때 어떻게 써야 하는지, 그런 것에 대해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습니다.

김진식 : 의도적이긴 해도 일관되게 흐르는 것은 있다고 보았습니다. ‘국파산하(國破山河)’나 ‘어복리(漁腹裏)에 장(葬)할 망정’이니 하는 비극적인 문장이 계속되는데, 이것은 곧 나라를 빼앗긴 것을 의도적으로, 일관되게 표현한 것으로 보았습니다. 도가(道家)적인, 초월적인, 그런 것보다는 유가적인 풍류와 서정성이 돋보이는 글입니다. 끝부분에서 무아적인 것으로 관조하는 모습을 보인 것이 특징입니다.

김태길 : 사회자도 준비를 많이 해 오시고 지정 토론자 세 분께서도 연구를 많이 해오셔서 이야기를 들으며 많은 공부가 되었습니다. 한 마디 하라면 무슨 이야기를 할까 많이 고심을 했는데, 아까 사회자가 가람 선생의 약력을 소개할 때, 학자다 뭐다 하면서 음담패설의 대가라는 말을 빼놓은 것이 생각났습니다. 그랬는데 그 말도 사회자가 나중에 또 해 버렸습니다. 더 이상 할 말이 없게 되었습니다만, 굳이 한 마디를 한다면, 이 글 둘째 문단에, 사람을 볼 때 눈도 코도 귀도 아니고 전체적으로 보아 마음이 드는 얼굴이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글도 그렇습니다. 사실 이 글도 난도질해 뜯어보면 흠잡을 데가 많습니다. 예를 들자면 둘째 문단 끝부분에 ‘그리하여 나는 부여를 처음 본 때부터 사랑한다’라는 문장이 있습니다. ‘그리하여’는 앞의 것과 논리적으로 닿는 부분이 있어야 하는데, 왜 그러한가에 대한 설명이 앞에 없습니다. 또 아까도 이야기가 나왔습니다만, ‘조그마한 단조한 산인 듯’이라는 문장에서도 ‘조그마한’ 다음에는 ‘단조로운’이라고 해야 합니다. 또 ‘단조한’이라고 하면 어딘가 일본 냄새가 나는 표현같기도 합니다. 이 밖에는 표현을 달리했으면 하는, 흠잡을 데가 많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는 좋은 수필이라고 느꼈습니다. 수필이라는 것은 요리조리 난도질하고 뜯어보았을 때 좋은 것도 좋지만, 쓱 한번 읽었을 때 좋은 수필이라고 기분 좋게 느끼면 그것이 바로 좋은 수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사람이건 수필이건 전체적으로 좋은 인상을 주는 것을 우리가 마음 속에 두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사회 : 이 합평회를 통해서 우리는 몇 가지 새로운 것을 얻게 되었습니다. 가람 이병기 선생이 기행수필 수필가라는 위상을 정립해 줄 수 있었고, 또 한 가지는 목하 유행중인 기행수필에 대한 점검과 반성을 아울러 해 보았습니다.

이 ‘낙화암 찾는 길에’는 비록 추상어가 많다거나 한자어가 많다, 생경한 표현과 부적절한 비교가 다소 있다는 등의 옥의 티를 이야기했습니다만, 전체적으로 볼 때 자연미의 묘사에 역사의식을 가미한 내밀한 수필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더 뜯어보면 체험과 명상이 내재되어 있고, 유구한 역사관도 여과해서 내재시킨 성공적인 수필이란 말씀이 있었고, 특히 예술성 면에서는 자기 개인의 풍류를 발로시키면서 전체적인 조망과 부분적인 심화를 잘 곁들여서 읽어서 편안하고 미감을 느끼는 성공된 수필이라고 의견을 모아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오늘 합평을 여기서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