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의와 겸양

                                                                                           여석기

 요즘 세상에는 별로 통용되지 않을 듯한 제목을 붙여 보았다. 예의는커녕 염치도 없고, 겸양의 미덕을 발휘하다가는 ‘바보’ 소리 듣기 알맞은 세태가 아닌가. 그럼에도 굳이 이렇게 타이틀을 붙인 데는 사소한 이유가 있다. 그 ‘사소’한 것이 도무지 마음에 걸려서 아예 ‘큰’ 제목을 달아본 것이다.

‘한국 사람’은 하고 거창하게 이야기를 꺼내는 나쁜 버릇이 내겐 있는데 도리 없다. 그래서 말하거니와 한국 사람은 남에게 양보하는 법이 없다. 그 양보라는 게 대단한 것도 아니다. 이를테면 길을 가는데 서로 마주쳤다고 하자. 비켜주는 법이 없다. 아마 ‘절대로’라고 단언해도 좋을 정도로 비켜주지 않는다. 그러면 정면 충돌하느냐 하면 물론 그렇지는 않다. 직전에 어느 쪽에선가 적당히 길을 비키기는 한다. 그러나 이것은 본능적인 행동이고 길을 가는 행위에서 따르기 마련인 하나의 ‘질서’ 즉, 예절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아무리 교육을 받고 지식을 익혀도 아주 초보적이고도 ‘인간다운’ 행동`─`예절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에 대해서는 아주 무지하다는 것이다.

우리 한국인`─`용서하시라`─`은 걷는데 대한 ‘질서’를 군대에서 행군하는 것밖에는 배우지 않은 것 같다. 그런데 젊을 때 군대에 징집되어서 배운 질서는 강요된 것이다. 그러니까 거기서 해방되면 쉽게 잊혀지고 만다. 한 걸음 나아가 그런 식으로 배운 것이 ‘질서’라면 아예 질서 자체를 외면하려고 든다. 그리고 공공질서라는 용어가 있는데, 우리는 아마 이 말을 가장 역겨워하지 않나 생각될 정도로 의도적으로 깨려드는 경향이 있다.

이런 이야기를 늘어놓으면 한량이 없고 또 지금 우리 사회의 크고 작은 일들이 이런 사소하다고 생각되는 기본에서부터 연유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길 가다 부딪칠 성싶으면 자기부터 먼저 길을 피해 주는 습성, 이런 것을 서양인들은 ‘에티켓’이라고 한다는데, 별것 아니라 우리가 말하는 예절이다. 우리는 그런 습성이 없는데 하고 자기 변명하자면 그만이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지나치리 만큼 ‘겸양의 미덕’을 발휘할 때가 있다. 윗자리에 있는 사람, 권력자, 돈 있는 사람`─`이런 ‘가진 자’들에게는 길을 비키는 정도가 아니다. 비굴하기 짝이 없는 작태를 부린다.

지금 세상은 이런 표리부동의 습속이 우리 사회 속속들이 스며든 것 같다. 그러니까 ‘우리 한국 사람’은 하고 어줍잖은 국민성 운운으로 호도해 버릴 성질의 것이 아니다. 온 나라가 매스컴 사회로 화해 버린 이 사회, 예의니 범절이니 하면 설날 차례상을 어떻게 차리고, 어른에게 세배를 어떻게 올리느냐 하는 것만 실연을 겸해서 가르쳐 주는 사회에서 길 가다 사람과 마주치면 서로 피하라는 것쯤은 ‘교육’할 가치조차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모든 일은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작은 것일수록 몸에 배어야만 실천이 가능한 법이다. 우리는 그 점을 잊고 있지 않는가. 신문 같은 데서도 보면 밀레니엄부터 시작해서 큰 화제들뿐이다. 우리 나라 공교육은 하도 여론에 두들겨 맞아서 가엾을 지경인데 거기서 ‘작은 일’들을 가르쳐 줄 마음의 여유가 있는지 자못 의심스럽고, 학부모는 그런데 신경쓸 정도로 한가롭지 않은 듯하다. 자녀들 과외 걱정부터 먼저 해야 되니까. 그러니 ‘작은 일’은 아예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

지금은 자유분방한 시대가 되어서 좋게 말하면 자기 개성만 살리면 족하고, 그와 동시에 유행이 휩쓰는 세상이 되어 그 ‘의상’ 속에 자기를 감춰 버리면 한없이 살기 좋은 세태이기도 하다. 그런 시대에 ‘작은 것’은 찾아 볼래야 흔적조차 발견하기 힘들 것이다. 길 가다 사람들과 부딪치거나 말거나, 문 열다가 먼저 밀고 들어가거나 말거나, 그게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쉽게 말해서 불감증이다.

불감증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가 사는 공동체에 대해 무감각하게 할뿐 아니라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라는 소단위의 ‘삶’의 의미를 깨닫게 하지 못한다. 오밀조밀하게 영위하는 삶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지 못하게 한다. 생활에서 감수성이 무디어 버리고, 정서의 윤활유가 메말라 버리는 것이다. 그것을 메우기 위해 물질적 만족을 추구하게 된다. 그러나 물론 물질적인 것으로 내면의 것을 대치할 수는 없다.

“작은 것은 아름답다”는 말이 있는데 그 말은 아마 내가 여기서 쓰는 작은 것과는 뜻이 다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늘 ‘큰 것(상대적이다)’만 쳐다보면서 작은 것은 놓치고 있지 않았던가. 한번쯤 곰곰이 생각해 볼일이다. 그래서 예의니 겸양이니 하는 것도 야단스럽게 교과서적으로 대할 것이 아니라 작은 데서부터 지켜 나가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모 일간지에 연재되는 독자의 체험담을 읽어보아도 전부 작은 이야기들뿐이다. 그런 것이 다 친절이고 겸양이고 예의다.

그런 이야기들 가운데 보면, 우리 한국 사람들(또 쓰게 되었다)은 거칠고 주위에 대한 배려가 부족하고 예의가 없는데 반해 예로 든 외국인들의 이야기는 그렇게도 친절하고 겸양하단 말인가. 되풀이 말하거니와 거기 등장하는 우리는 특별히 나쁜 사람이 아니고, 거기 나타나는 외국인도 특별한 인간은 아닐 것이다. 다만 전자는 우리의 자화상이고 후자는 ‘작은’ 친절과 겸양 그리고 예의를 몸에 익힌 평범한 인간들일 뿐이다. 선진화니 세계화니 일류 국민이니 하고 북 치고 장구 치고 하기 전에 우리는 좀더 겸허해야겠다. 아주 ‘작은 일’부터 말이다. 길 가다 비켜 주는 그런 예의에서부터 말이다.

 

 

 

여석기

1922년생. 고려대 명예교수(영문학).

학술원 회원. 국제교류진흥회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