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의 세계

                                                                                                   박이문

 내가 가장 즐겨 보는 TV 프로그램 중의 하나는 ‘동물의 세계’이다. 동물의 세계에서 간접적으로나마 자연을 새삼 발견하고 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발견은 언제나 경이롭고 황홀하고 신선한 경험이다. 발견 대상이 근원적인 것일수록 그 경이와 황홀감과 신선감은 그만큼 더 크다. 자연은 모든 것의 원천인 동시에 귀결점이다. 인간도 자연에서 태어났고 자연으로 돌아간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연을 통해서만, 자연에 비추어서만, 자연 속에서만 자신의 참 모습을 발견하고 배울 수 있고, 삶의 깊이를 경험할 수 있다. ‘동물의 세계’는 수많은 것을 가르쳐주고, 수많은 감동을 제공하며, 수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동물의 세계’에서 우리는 지금까지 보지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상상할 수 없던 곤충, 파충류, 어류, 조류에서부터 곰이나 늑대, 호랑이나 침팬지와 같은 고등 동물들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종류의 생명체와 만나면서 우리의 지적 지평선을 확장하고, 우리 자신과 다른 동물들, 생물체들과의 관계, 그러한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인간 존재의 의미, 한 실존적 개체로서의 나의 삶의 의미를 생각하게 된다. 우리는 구조적으로 신비로울 만큼 정밀하고도 기묘한 그들 하나 하나의 생김생김을 발견하고, 또 모든 동물들의 수놈과 암놈의 짝짓기에서 볼 수 있는 종족 번식에 대한 결사적 투쟁, 각기 자신들의 새끼에 대한 어미의 헌신적 정신에서 그들의 ‘도덕성’에 새삼 숙연해진다. 모든 동물들의 수학적인 엄밀한 구조나 색채의 다양성은 자연이 우리를 미학적으로 황홀케 하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동물의 세계’는 ‘도덕적’으로 숙연하고 미학적으로 황홀한 것만은 아니다. ‘동물의 세계’는 삶의 가장 근원적 원리로서의 약육강식, 적자생존이라는 잔인한 원리와 자연의 법칙, 우주의 궁극적 질서로서의 삶의 고달픔을 또한 보여 준다.

자연 속에서 모든 동물들은 서로 먹고 먹히는 관계로 얽혀 있다. 한 종의 동물은 다른 종의 동물을 먹어야 살고, 한 동물은 다른 동물을 힘으로서 이겨야만 생존한다. 다람쥐는 여우에 잡히지 않도록 밤낮으로 주위를 살펴야 하고, 덩치 큰 누나 연약한 톰슨가젤은 다같이 사자나 치타나 하이에나에게 잡히지 않도록 항상 눈을 굴려 주의를 하고 필요하면 도망쳐야 한다. 사자는 톰슨가젤이나 누를 잡아먹거나 치타가 잡은 톰슨가젤을 뺏앗아 먹어야 생존할 수 있고, 한 사자는 다른 사자를 몰아내고 누나 톰슨가젤을 혼자 다 먹어야 살아 남을 수 있다. 이보다 더 가혹하고 잔인한 세계가 존재할 수 있는가? 하지만 이것이 바로 자연, 아니 우주의 피할 수 없는 현실이며 질서이다. ‘동물의 세계’에서 볼 수 있는 진리의 하나는 생존의 가혹함이다. 내가 ‘동물의 세계’에 시선이 끌리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이 때문이다.

나는 오늘도 ‘동물의 세계’에서 전개되는 자연계의 드라마를 정신을 잃은 채 그러나 복잡한 생각으로 거기서 눈을 떼지 못하고 바라본다.

드라마는 아프리카 세렝게티 초원이라는 방대한 무대에서 벌어진다. 초원이라 하지만 오랫동안의 가뭄으로 거의 모든 풀이 말라 죽은 삭막한 모래밭이다. 그래도 아직 몇십 마리 누와 톰슨가젤들이 뜨거운 햇빛 아래 겨우 남아 있는 풀잎을 뜯고 있다. 바로 이때 어디서인가 암사자가 나타나자 순식간에 초원은 죽음과 삶이 왔다갔다하는 긴장의 공간으로 변한다. 좀 떨어진 잔지 속에서 숨어 있던 암사자가 갑자기 톰슨가젤를 향하여 덤벼든다. 깜짝 놀라 혼이 빠져서 도망치는 어린 톰슨가젤을 한참 동안 추적하던 암사자가 추적을 포기하고 걸음을 늦춘다. 어린 톰슨가젤은 아찔했던 죽음의 위기를 벗어나 멀리 줄달음친다.

이 장면을 보면서 나는 손뼉을 치며 만세를 부르고 싶었다. 내가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던 대로 어린 톰슨가젤이 강한 암사자에 먹히지 않고 살아 남았기 때문이다.

암사자는 놓친 먹이를 허탈하게 바라보면서 입에 침을 흘리면서 허덕거리며 어슬렁어슬렁 힘없는 걸음을 걷는다. 암사자는 오늘 벌써 세 번째로 먹이 사냥에 실패한 것이다. 암사자와 나무 그늘에서 어미를 기다리는 세 마리의 새끼가 아무것도 먹지 못한 지 이미 이틀이 되었다. 오늘 중 먹이를 못 잡으면 어미 사자를 비롯한 온 사자 가족이 굶어 죽을 판이다.

바짝 마른 풀숲에서 허덕거리며 잠깐 숨을 돌린 암사자는 다시 한 번 목숨을 건 사냥을 마지막으로 시도해야 한다. 살아 남자면 다른 선택이 없다. 암사자는 떼를 지어 지나가는 수많은 톰슨가젤 가운데에서 가장 약해 보이는 놈을 골라 있는 힘을 다해서 공격을 시작한다. 자연의 약자 톰슨가젤과 자연의 최강자 암사자 간에 먹고 먹히는, 죽이고 죽는, 쫓고 쫓기는 목숨을 건 극도의 아슬아슬한 긴장이 감돌고 있다. 나는 톰슨가젤과 암사자 중 어떤 편에 서야 하는가?

바로 지난번 광경을 보았을 때 나는 분명히 톰슨가젤 편이었다. 내가 톰슨가젤이 암사자에게 잡히지 않기를 얼마나 간절히 원했던 것인가! 그러나 암사자의 상황을 알고 난 지금 나의 생각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나는 더 이상 어느 편에 서야 할지 알 수 없다. 아니 이제 나는 내가 어느 새 암사자의 편에 서 있음을 느낀다. 암사자가 성공적으로 톰슨가젤을 사냥해서 그의 살과 창자를 자신의 새끼들과 나누어 먹고 살아 남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생긴다. 암사자와 그 새끼들의 굶주린 상황 그리고 그에 따를 그들의 죽음이 너무나 애처로워졌기 때문이다. 만일 이번의 사냥에도 실패한다면 아프리카 초원의 왕자 암사자와 그의 가족에게는 멸종이라는 운명만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같은 심상의 변화는 내가 아무 죄도 없는 톰슨가젤의 죽음을 원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과연 이러한 나의 심상의 변화는 도덕적으로 인간적으로 옳은 것인가? 나의 심성은 잔인하지 않은가? 객관적 현실은 굶주린 암사자와 어린 톰슨가젤 가운데 어느 한쪽의 죽음을 선택할 것을 요구한다. 그렇다면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하는가? 그 중 한쪽을 선택해야 한다면 그 선택의 근거는 무엇인가?

설득력 있는 대답이 나오지 않는다. 이성적 해결책이 막막하다. 이성적으로는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다. 그러고 보면 심정적으로도 마찬가지다. 확실한 대답이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도 나는 굶주린 사자와 힘없는 톰슨가젤의 둘 가운데 한쪽의 삶과 다른 쪽의 죽음을 선택해야 하는 삶의 피할 수 없는 현실은 인간적으로 너무나 가혹하고 그러한 자연 그러한 우주의 질서 앞에서 우리는 숙연해지기도 하지만, 자연, 우주 그리고 존재 일반은 그 자체로서 무한히 신비롭고 아름답기도 하지만 그와 동시에 너무나 잔인하고, 거기에는 무엇인가가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라는 생각을 피할 수 없게 한다.

 

 

 

박이문

보스톤 시몬즈대 명예교수.불문학자. 철학자.

저서 『상황과 선택』, 『철학의 여백』 등.